2014년 1월 26일 일요일

[BC7세기] 그리스 중보병과 방진

1. 그리스 중보병 과 방진
 - 아시리아 군대나 페르시가 군대가 정교한 전법을 사용하고 지중해 동쪽 지역을 주름잡던 시절, 에게해 서쪽 그리스 인들의 전쟁방법은 상대적으로 형편없었다. 다른 아이디어가 그랬듯이  고대의 전술도 이집트.아시리아.페르시아에서 그리스 지역으로 전래된 것이 많다. 그런데 기원전 7세기경 그리스는 근동지역에서는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전법을 개발했다.


 - 그리스 군은 중장 보병들로 구성된 밀집대형에 의존해 싸웠다. 이들 보병들은 갑옷, 투구, 청동제 정강이 받이 등을 착용하고 방패를 들었으며, 주무기로 2.1 ~2.4m 길이의 창을 지녔다. 그리하여 각 병사는 34kg 달하는 장비와 무기를 들고 싸워야 했다. 이에 연유하여 그리스 병사를 '호플라이트 hoplite' 라고 불렀다.


 - 방패는 직경 90cm 의 원형 목재에 청동판을 가장자리에 씌워 만들고, 방패 안쪽 가운데와 가장자리에 두개의 손잡이를 부착했다. 이 방패를 사용할때 보병은 왼쪽 팔꿈치까지를 가운데 손잡이 끈에 끼우고 가장자리 끈을 손으로 움켜잡은 채 앞몸을 보호하면서 싸웠다.


 - 이러한 중(重)보병의 등장은 당시 정치적 · 군사적 환경변화에 기인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시대의 전쟁은 주로 아킬레우스와 같은 신 또는 영웅들의 싸움으로서, 전차(전투용 마차)를 타고 달려가 결투를 벌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즉, 귀족신분의 전사들만이 참가하고, 승패는 그들의 개인적 기량에 따라 결정되었다. 말과 마차가 비싸기 때문에도 일반인들은 전투에 참여할 수 없었다.


- 기원전 8세기경 그리스는 인구가 증가하고 농업기술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땅을 균등히 나누어 소유하는 등 가족 위주의 자작농 사회로 바뀌었다. 즉, 집단생활로부터 가족단위의 농업사회로 바뀐 것이다. 그들은 한 사람의 우두머리에게 의존하던 생활보다는 '위로부터의' 간섭 없이 가족 단위의 서로 대등한 입장에서 농사짓는 생활을 통해 생산성을 증대시키며 부유하게 살게 되었다.


-이런 생활로 정착하는 동안 그리스인들은 가족들을 서로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대표들을 선출하고, 대표들로 자치회를 구성하여 운영하는 방식의 도시국가를 형성했다. 그리스 내에 작은 도시국가는 1천 개가 넘게 형성되고, 인접한 작은 도시국가들이 모여 큰 도시국가를 형성했다. 그리고 도시국가 간에는 주로 땅에 대한 소유권을 둘러싸고 경계지역에서 분쟁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투표권을 행사하는 시민들은 자기 도시국가를 스스로 지키기 위해 모두 싸움터로 나가 싸웠으며, 그러지 못하면 참정권을 잃었다. 말하자면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독특한 정치제도에서 민주주의 원리를 적용했듯이, 군사제도에 있어서도 다수가 대등하게 참여하는 민주주의적 방법을 채택하여 시민군대를 이룬 것이다.


- 병종은 누구나 쉽게 참여하고 특별한 기술 없이도 집단을 이루어 싸울 수 있는 보병으로만 구성했다. 호플라이트는 자신의 창과 방패를 스스로 준비해야 했다. 그래서 초기에는 각양각색이었으나 나중에는 제조업자들에게 주문생산을 통해 구입하여 어느 정도 통일을 기할 수 있었다.


2. 그리스 중보병 전술 전략
- 호플라이트 개개인은 이전의 귀족전사와 비교할 때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그야말로 형식적인 병사에 불과했으며, 따로 고립되어 있을 때는 적에게 좋은 표적이 될 뿐이었다. 그러나 밀집대형을 이루어 싸울 때는 무서운 힘을 발휘했고, 종래의 전사들의 공격이나 또는 페르시아 군대처럼 기병 위주로 편성된 막강한 군대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그리스인들이 밀집대형을 이루어 싸우게 된 데는 농업방식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다고 고대 그리스 역사가 크세노폰은 설명했다.


- "농업은 사람들에게 서로 돕는 방법을 가르쳤다. 또한 적과 싸울 때도 땅에서 일할 때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 그리스인들의 전투는 기본적으로 농부들의 전투로서, 농지를 놓고 농지 위에서 밀집대형을 이루어 싸우고, 구릉이나 산악지형에서는 싸우지 않았다. 일반적으로는 수확철이 지난 다음 서로 약속한 장소에 집결하여 한나절 싸우는 식으로 전투가 이루어졌다. 대개 전투시간은 대단히 짧았고, 한 번의 충돌로 결판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 열(列)과 오(伍)로 배치된 보병들의 밀집대형은 사각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방진(phalanx)'이라고 불렀다. 통상 8열 횡대대형을 유지한 방진은 전투를 벌일 때 열과 오로 단단히 뭉쳐 충격력을 이용하여 상대편 방진과 정면충돌함으로써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 적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최전열을 견고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제3열까지는 창끝을 앞으로 내밀고 창찌르기 경합을 벌여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쓰러지는 병사가 나타나면 뒷열에 있는 병사가 자리를 메웠다. 뒷열들로부터 압력을 받는 가운데 두 방진은 팽팽히 맞서지만 어떤 단계가 지나면 힘이 약한 쪽의 전열이 흩어지며, 그리하여 공포에 빠진 병사들이 대열을 이탈하여 도망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승부는 끝이 났다.


 - 병사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병사는 오른쪽에 배치되었다. 그리하여 상대의 약한 왼쪽을 공격하게 되니 방진의 전진방향은 자연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시계 반대방향으로 선회하는 경향을 보였다. 방진 간에 육박전을 벌인 전투에서 열과 오를 유지하는 일이란 극히 어려운 일이지만, 그리스 병사들은 용기가 있었고 또한 전장에서 공포심을 극복할 수 있도록 훈련 및 군기를 강조했다.




 -그리스인들은 전장에 나가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전장에서 죽는 것에 대해서는 자랑스런 삶의 마감으로 여겼다.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하며, 그렇지 못하고 방패를 내던지고 도망가는 일은 가장 비굴하다고 인식했다. 그것은 비겁할 뿐 아니라 다른 전우들을 위태롭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그리스의 한 도시국가였던 스파르타에서 어머니들은 아들들을 전장에 내보낼 때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 "집으로 돌아올 때는 방패를 들고 오고, 그렇지 못하면 방패 위에 누워서 오너라."
 
- 스파르타는 완전히 병영국가로서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던 도시국가였다. 스파르타의 모든 성인남자들은 30세에 이르기까지 정기적으로 군대막사에서 생활하고 고도의 군사적인 기예를 닦았다. 그리스의 다른 도시국가 군대도 스파르타군보다는 덜 엄격하고 훈련이 약했으나, 자국을 방어하는 희생정신에서는 결코 스파르타군에 못지않았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