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2일 일요일

[BC480] 살라미스 해전

1. 살라미스 해전
가. 페르시아 제국 3차 침공
다리우스가 죽고 페르시아 왕위에 오른 아들 크세르크세스(Xerxes)는 부왕의 유언을 받들어 제3차 그리스 원정을 준비했다. 기원전 480년 봄 크세르크세스는 약 16만 명의 병력과 1,200척의 함선을 끌고 그리스 북부로 진격했다. 그의 군대는 4년에 걸쳐 노예들을 동원, 헬레스폰토스(오늘날의 다르다넬스) 해협에 선박을 연결시켜 만든 다리를 건넜다.


한편, 마라톤 전투 중 밀티아데스 휘하에서 전쟁수업을 받은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는 아테네에서 명망이 높은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는 페르시아의 재침 가능성을 경고하고, 아테네가 육군만으로는 그들의 침략을 막을 수 없으니 에게 해를 지킬 강력한 해군력을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본래 해전은 함선을 건조하고, 또한 선원을 양성하는 데에 비용이 많이 들어 아테네 인들은 해전준비에 소홀한 경향을 보여왔다.


테미스토클레스의 호소에 힘입어 아테네는 3단 노함선(trireme)을 건조했다. 170명까지 노를 저을 수 있는 이 배는 1인당 하나의 노를 맡도록 했으며, 전체적으로는 3단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모두 총 380척의 함대를 확보했다. 1,200척의 페르시아 함선과는 비교가 안 되는 숫자지만, 그리스 3단 노함선이 질적으로는 우수했다.




당시 해전은 육지가 보이는 곳이나 해안으로부터 매우 가까운 곳에서 전개되었다. 그리스 3단 노함선은 페르시아 것에 비해 기동성과 충격력에서 훨씬 뛰어났다. 그리스 함선은 단단한 뱃머리를 높이 세우고 최고속력으로 돌진, 적선에 부딪침으로써 적선을 침몰시킬 수 있었다.


2.테르모 필레 전투




페르시아 육군이 에게 해 북쪽 해안을 따라 마케도니아와 테살리아 지방을 통과해오자, 그리스인들은 테르모필레(Thermopylae)의 좁은 산길에서 맞서 싸우기로 했다. 그곳은 테살리에서 아티카로 향하는 관문으로서, 아테네 북쪽 130㎞ 지점이며 동쪽으로는 에보이아 해협이 있다.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Leonidas)는 7,000명의 보병을 이끌고 좁은 산길을 지켰다. 요해지 테르모필레에 도착한 페르시아 육군은 우선 정찰행동에 4일을 보냈다. 5일째부터는 쌍방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는데, 창과 방패만으로 방어전을 치르는 스파르타군은 적의 화살이 소나기처럼 쉼 없이 쏟아지는데도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7일째, 어느 그리스인 배신자의 안내로 페르시아의 한 부대가 샛길로 빠져나가 레오니다스 군의 배후를 쳤다. 그런데 스파르타는 올림피아 제전 기간 중이어서 레오니다스가 이끌고 온 순수 스파르타 전사들이 그의 정예근위대 300명밖에 없었다. 이들은 레오니다스의 직접 지휘 하에 선봉장을 맡아 싸웠으며 적 기습 포위망에 갇히자, 동맹군 주력부대를 다 철수시키고 자신들만이 남아 끝까지 싸우다 다 장렬하게 전사했다.





레오니다스의 방위전은 무모한 것이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았다. 레오니다스는 아르테미시온 해전에서 큰 피해를 입은 그리스 해군으로 하여금 적군을 현혹시키면서 에보이아 섬과 본토 사이의 좁은 해협을 통해 무사히 퇴각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준 바로 최고 공로자였다.
스파르타 전사들의 장렬한 옥쇄는 전체 그리스인들에게 크나큰 감명을 주었다. 그리하여 훗날 이 싸움터에 시인 시모니데스의 다음과 같은 시를 새긴 비석이 세워졌다.


나그네여, 가서 라케다이몬(스파르타) 사람들에게 전해주오, 우리들은 명(命)을 받들어 여기에 잠들었다고······.


테르모 필레 전투 참고 사이트


이후 페르시아군은 여세를 몰아 파도처럼 중부 그리스를 휩쓸고, 아테네까지 진출했다.
육전에서의 잇따른 패배소식을 들으며 그리스 함대는 해안을 따라 아테네와 살라미스 섬을 향해 멀리 우회했다. 이제 함대 외에는 그리스를 구할 방법이 없음을 알게 된 테미스토클레스는 본격적으로 페르시아 함대를 유인하여 해전을 벌일 계획을 세웠다.


그는 전투 장소를 살라미스(Salamis) 섬과 아티카 사이의 해협으로 결정했다. 그곳 해협은 폭이 2~3㎞로 좁아서 페르시아의 밀집함대를 끌여 들여 싸운다면, 우수한 해군을 거느린 그리스에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보았다. 본래 살라미스 섬은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이 아들을 낳은 곳으로서, 그곳을 점령한 자가 바다를 장악한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섬이었다.


크세르크세스는 이미 육지를 거의 점령한 상태에서 해전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았으나, 테미스토클레스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크세르크세스에게 위장간첩을 보내 "그리스군은 공포에 빠져 서둘러 달아날 생각만 하고 있다"는 거짓정보를 흘리도록 했다.


함정에 빠져든 크세르크세스는 9월 29일 날이 밝자 공격을 개시했다. 구름떼처럼 몰려오는 페르시아 함대를 본 그리스군 내에서 동요가 일기 시작했으나, 테미스토클레스는 부하들에게 필승의 복안을 발표하고 침착하게 전투대형을 유지하고 끝까지 버티도록 했다.


전술적 이점은 그리스 쪽에 있었다. 페르시아 함대가 좁은 해협 때문에 대형을 유지하지 못한 채 무질서하게 공격하는 데 비해, 그리스군은 준비된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반격을 취하는 것이 가능했으며, 또한 빠른 속도와 단단한 충각을 이용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해협이 페르시아 함대로 꽉 메워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테미스토클레스는 일순간에 공격명령을 내림으로써 곧 격전이 벌어졌다. 그리스 3단 노함선은 적선의 노를 부러뜨리고 적선 좌우 측면을 들이받고 하는 등의 기술적 이점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약 7시간의 격전을 치른 결과 페르시아는 200척의 함선을 격침당하고, 또 그만한 숫자를 그리스군에 포획당했다. 이에 비해 그리스 함대는 불과 40척을 잃었을 뿐이었다.


크세르크세스는 원정 후 시일이 너무 오래 지난데다가 해상에서 대패를 당해 보급마저 끊길 위험에 처하게 되자 서둘러 회군하고 말았다. 그리스 해군은 여세를 몰아 이듬해 여름 소아시아 지역으로 출동하여 페르시아의 나머지 함대를 모조리 쳐부수었다.


살라미스 해전 후 그리스는 두 번 다시 페르시아의 침공을 받지 않았으며, 이로써 막강한 해군력을 가진 아테네는 오랫동안 지중해의 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살라미스 해전 참고 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 살라미스 해전 - 그리스 함대가 페르시아 함대를 대파하다(BC 480년)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2010.7.16, 가람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