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13일 일요일

인류 역사는 전쟁의 역사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

고대로 부터 인간이 국가간의 갈등을 대화로 풀지 못하고 전쟁으로 점철해 온 이유는 인간이 어리섞어서도 아니고 반대로 용맹해서도 아니다.
한 나라를 통치하는 왕과 그의 추종세력들이 자기들의 통치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전쟁을 이용해 왔을 뿐이다.
더욱이 정통성이 없는 폭군이나 독재자는 때로는 일부러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을 지속 시키며 통치세력에 대한 불만과 저항을 효과적으로 억누르고 잠재웠던 것이다.
태평하면 분위기가 느슨해져 필연코 불평하는 자들이 생기고 시끄럽게 하므로 적절히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긴장 국면을 조성해야 하는데 외부의 적을 만들어내고 군대를 조직, 훈련시키고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국민들의 관심사를 하나로 묶어 내고 다른소리를 철없는 소리로 묵살 하며 또 실제로 전쟁을 해서 적을 무찌르고 전리품을 풍부히 챙기면 국부도 커지고 백성들도 만족 시킬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일거양득의 수지 맞는 일이 아닌가?
현대에도 정통성 없는 정부를 가진 국가일수록 냉전적이고 호전적인 외교전략을 구사하는데 이것은 그들 정부의 생존을 위한 필연의 선택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다만 현대의 산업화 된 국가들은 전쟁의 폐해가 너무 크므로 실제의 전쟁은 피하고 대결과 긴장국면을 적절히 조성하면서 국민들의 관심을 외부의 적으로 돌리는 전술을 사용하는 것이다.
한반도의 남한과 북한은 이미 60여년전에 동족상잔이라는 전쟁을 치른 전력으로 인해 양쪽의 국민들이 자연스레 적대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양쪽의 정부 마져도 적대감정을 해소 할 노력은 게을리 하면서 오히려 냉전적 사고로 적대감정을 부추기고 있는게 작금의 현실이다.
북한은 미제국주의가 처들어 온다고 똑같은 선동을 60여년 동안 반복하고 있으며 남한은 북한의 호전성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최근에는 핵무기의 폐기를 오로지 외치고 있다.
그리하여 북한에서 바른 말을 하면 반동이 되고 남한에서 정권에 저항하면 간첩,빨갱이가 되는 서글프고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반백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분단의 비극이다
북이나 남이나 정통성 없는 기득권 세력은 분단의 비극을 치유하려는 노력은 커녕 교묘하고 치밀하게 분단의 비극을 기득권 유지에 이용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가
이러한 몰이성적인 상태에서는 올바른 언로도 참다운 민주주의도 불가능한 일이며 형식적 민주주의와 가짜 민주주의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진정한 민주주의가 정착되기 위해서도 통일이 필요하지만 이제는 그 통일도 비젼 없이 남북이 각자의 주도권을 양보하지 않는 주장이 되어 허망한 메아리가 되고 있다
아무리 상대가 약하다 한들 자존심 마져 없을까
엄연히 상대가 존재하는 한 상대의 입장을 심사숙고 하며 공통의 분모를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한데 힘겨루기와 기싸움으로 오히려 통일의 거리를 더 멀게 하고 있다
아니 그러한 힘겨루기가 통일을 하기 싫은 교묘한 속내를 표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각자의 기득권과 현상유지를 위해서는 현재의 서로가 필요하므로 서로의 존재가 사라지는 통일이 자못 싫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60년대 이청준의 소설이 생각난다
<병신과 머저리> : 어느 동네에 조금 모자라는 형제가 같이 살면서 항상 티격태격 싸우는 것을 보면서 동네사람들이 병신과 머저리 형제라고 놀렸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2014년 6월 29일 일요일

[BC326] 히다스페스 강 싸움




전투 이전의 상황

중장보병 중심의 그리스 전술은 기원전 340년 전후에 마케도니아의 혁신적인 전술가 필리포스 2세에 의해 혁파되었다. 필리포스 왕의 군사 개혁은 에파미논다스가 시도한 대형의 변화에 기병을 중시하고, 장갑 보병의 방어력을 기존보다 높이고, 공격력을 비약적으로 강화한 밀집 종대의 채택에 있었다.

우리는 마케도니아군이라면 금방 팔랑크스를 연상한다. 그러나 마케도니아군을 무적으로 만든 진짜 요인은 기병대의 운용에 있었다. 에파미논다스의 전투에서 보았듯이 당시의 기병대는 장갑 보병의 밀집 방진의 돌격을 돕는 견제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에 착목하여 기병을 하나의 전력으로서 보병과 융합시킨 에파미논다스의 사상은 마케도니아군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보병과 마찬가지로 중장기병과 경장기병으로 분화된 기병은 그 기동력과 타격력을 효과적으로 조합하여 활용하는 병종이 되었다. 이 가운데 경장보병은 용병으로 고용된 이민족 병사가 담당한다. 갑옷을 걸치지 않고 투창을 무기로 하는 경기병이 전초전과 정찰을 담당하고 적진을 교란하는 임무를 맡는다. 그뒤에 중기병이 나선다. 중기병은 헤타이로이라 불리는 친위대로서 앞뒤에 창 끝을 단 길고 무거운 창을 들고 흉갑을 착용하였다.
알렉산드로스의 필승 전법
그들이 적진의 배후로 우회 돌격하여 후방에서 몰아세운다. 그 압력에 밀린 적병은 어쩔 수 없이 전진하게 되고 팔랑크스로 조직된 보병 대열에게 공격을 당하는 것이다. 기병을 망치로 삼고 보병을 모루로 삼아 적진을 두드린다고 하여 ‘망치와 모루’ 전법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보병의 밀집 부대는 결전 병력의 임무를 맡는다. 그들은 길이 3.7미터의 장창을 빈틈없이 꼬나들고, 전방 병사는 커다란 방패로 자기 앞을, 후방 병사는 머리 위와 측면을 가린다. 인간으로 만든 중전차와 같은 방진은 그리스 시대처럼 오른쪽으로 치우치는 일 없이 폭발적인 충격력을 발휘하였다.

보병 운용에서도 역시 커다란 개혁이 이루어졌다. 종래의 전술은 횡 1선으로 늘어선 밀집 방진이 동시에 전진하여 상대를 밀어붙이는 것이다. 에파미논다스가 사선진을 고안하고 운용 면에서 발전이 있었지만 역시 전투 자체는 밀집 방진간의 전투에 머물러 있었다.

마케도니아에서는 보병을 분화시켰다. 보다 강고한 방어력과 돌격력을 가지는 중장보병 외에 경장 방패병과 산병을 둔 것이다. 방패병은 작고 가벼운 방패를 들고 창으로도 쓸 수 있는 투창으로 무장하였다. 산병도 경장보병이기는 하지만 이들은 활과 투석기로 무장하였다. 그들의 임무는 아군의 전면에 분산하여 모든 각도에서 투척 병기를 사용해 적의 병력을 삭감하는 동시에 적군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다.

방패병은 산병으로 움직이기도 하고 또 횡진을 짜면 적의 장갑 보병을 감당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병종이 적을 가로막고 공격을 차단하는 사이에 중장보병 팔랑크스가 종진을 짜고 돌입하여 적을 분단한다. 이것이 알렉산드로스의 필승 전술이었다.

이 전법으로 페르시아를 무찌른 알렉산드로스는 동방으로 대원정을 나섰다. 카스피 해 연안에서 아랄 해에 이르고, 나아가 남하하여 인더스 강을 넘은 알렉산드로스는 북인도를 지배하는 포루스 대왕과 자웅을 겨루게 된다.

포루스는 키가 240센티미터에 이르는 거인이며 탁월한 전술가였다. 그는 전차와 기병·보병으로 구성된 강력한 군대와 2백 마리나 되는 훈련된 전상을 거느리고 있었다.

인더스 강의 지류 히다스페스 강 건너편에 포진한 포루스의 대군을 본 알렉산드로스는 도하 단계부터 고전을 면치 못한다.
중장보병
방패병
산병
기병

전투의 경과

도하 지점의 기만-서전의 승리
포루스 대왕은 알렉산드로스의 군대가 히다스페스 강을 건널 때를 노리고 있었다. 도하 중인 군대는 전투력과 방어력을 거의 발휘하지 못한다. 때문에 고대 병서는 적의 도하 중, 혹은 선두 집단이 다 건널 즈음에 급습하여 섬멸하라고 가르친다.

알렉산드로스도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도하 지점을 속이느라 부심했다. 가짜 장군을 진지에 두어 인도군의 눈을 속이고 자신은 병사를 이끌고 하류로 돌아가려고 했다. 강이 가까이 있는 이상 그 흐름을 이용한 기동전을 생각했겠지만, 인도군 앞에 늘어서 있는 코끼리 대군이 문제였다.

신속한 기동에는 기병이 불가결했다. 그러나 말은 낯선 거구의 동물을 보고 겁에 질려 있었다. 뗏목을 짜서 강을 건너려고 하면 말이 겁에 질려 날뛸 것이었다. 수운 기동을 포기한 알렉산드로스는 부대를 빠르게 기동시켜 포루스 왕의 주의를 끄는 작전을 썼다.
인도군 궁병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강 건너편을 달리는 마케도니아군을 따라 우왕좌왕하는 병사들의 움직임에 짜증이 난 포루스는 결국 병사의 이동을 금했다. 진을 치고 있다가, 도하한 마케도니아군을 전군을 동원하여 격퇴하는 전법으로 변경한 것이다.

알렉산드로스의 의도가 적중했다. 때마침 닥친 폭풍우로 시야가 막힌 밤중에 알렉산드로스는 포루스의 의표를 찌르며 상류로 병사를 이동시켰다. 그리고 본래의 진지는 노장 크라테로스 장군에게 맡기고, 병사 5천 명과 몇 개 대대의 기병을 주어, 기회를 보아 강을 건너라고 명령한다. 이 부대는 귀중한 예비대가 되어 승부를 결정짓는 역할을 해낼 터였다. 크라테로스는 포루스가 알렉산드로스와 싸우기 위해 자리를 뜨고, 전상 부대가 도하 지점을 떠난 경우에만 도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거의 온몸을 물에 담그며 강을 건넌 알렉산드로스는 재빨리 남하했다. 알렉산드로스가 강을 건넌 사실을 안 포루스는 이대로 군대를 선회시키다가는 강 건너편에 남아 있는 마케도니아군에게 옆구리를 당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본대는 내버려두고 기병 2천과 1백20량의 전차를 보냈다. 이 부대의 지휘관은 포루스의 아들로서, 아버지를 닮은 용맹한 젊은이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일찌감치 전투 대형을 갖추고 있었다. 인도군이 채 전투 태세에 들어가기도 전에 돌격을 명한 알렉산드로스는 중기병의 돌격으로 인도군을 격파한다. 왕자는 분투했지만 기동성이 떨어지는 전차는 기병대의 적수가 아니었다. 중기병대의 파상 공격에 병력을 잃은 왕자는 마침내 전장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전투 개시! 헤타이로이 중기병대가 돌격하다
왕자의 전사 소식을 전해들은 포루스는 격노하여 전군에 출진을 명했다. 그러나 그는 역시 뛰어난 명장이었다. 건너편의 크라테로스 부대에 대한 대비책으로 소수의 전상을 남기는 것을 잊지 않은 것이다.

전날 밤 내린 비로 땅이 질척이기는 했지만 병사의 운용에 큰 지장은 없었다. 오히려 포루스가 거느린 전차대가 더 불편해졌다. 포루스가 취한 진형은 전형적인 보병 횡진이었다. 3만 보병의 방진이 무려 3킬로미터에 걸쳐 장대한 진을 편다. 그 양익에 기병대가 배치되고, 보병 앞에는 적당한 간격을 둔 전상이 개전을 앞두고 기세 등등하게 늘어서 있다. 기병 앞에는 1백80량의 전차가 두 편으로 갈라져 늘어서 있다. 전차의 중화력으로 마케도니아 기병대를 혼란에 빠뜨리고, 기병과 전상으로 오금을 박겠다는 전법이다.

이에 알렉산드로스는 병력을 집중시키는 진형을 채택하였다. 장갑 보병이 8개의 팔랑크스를 짜고 기병은 5개 대대로 나뉘어 그 좌익에 포진하였다. 그 가운데 4개 기병대는 헤타이로이로서 대왕의 친구라 불리는 중기병대였다. 나머지 1개 대대는 활로 무장한 경기병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헤타이로이 기병대 1개 대대에게 아군의 배후를 우회하여 인도군의 우익으로 돌아가라고 명했다. 이 작전을 명받은 경기병 지휘관 코에노스 장군이 떠나자 알렉산드로스는 경기병에게 출격을 명했다.

거의 동시에 인도군 좌익에서도 전차대가 달려나온다. 경기병은 특유의 기동력을 발휘하여, 바퀴가 진흙에 빠져 옴짝달싹 못하는 전차대의 측면으로 돌아가 화살을 연발했다. 기동력이 떨어지는 전차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한다. 포루스는 금방 무너진 전차대에 이를 갈면서 우익 기병대를 마케도니아군 기병을 향해 재빨리 보냈다.

그 사이에 전차대를 장사지낸 마케도니아 경기병은 거리를 유지한 채 잇달아 화살을 쏘았다. 포루스 왕의 좌익 기병은 혼란에 빠져 조직적인 반격을 하지 못한다. 고전하는 아군을 구하려고 질주하는 인도군 우익 기병의 배후를, 보병대 사이로 나타난 마케도니아 중기병이 맹렬하게 덮쳤다.

포루스가 아군의 기병대를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알렉산드로스는 몸소 말허리를 박찼다. 헤타이로이 중기병대를 직접 통솔하여 인도 기병의 한가운데를 치고 지나가 보병대의 좌익 측면을 급습했다.

길게 늘어진 인도 보병대는 측면 공격에 대항하지 못한다. 중장보병의 밀집 방진만을 결전 병력으로 삼았던 그리스의 군대라면 이 시점에서 승부가 났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포루스도 대왕이라 불리는 역전의 용사이다. 그에게는 뛰어난 완력과,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무적의 전상 군단이 있었다.

대지를 뒤흔드는 중전차-산병 대 무적의 전상 군단!
알렉산드로스가 말을 타고 싸우는 것처럼 포루스 역시 몸소 가장 크고 사나운 코끼리를 타고 있었다. 아프리카코끼리보다 작은 아시아 코끼리이기는 하지만 포루스의 코끼리 부대는 특히 몸집이 커다란 코끼리만을 선발하여 구성되었다. 한니발의 그것이 몸집이 작은 둥근귀코끼리였던 것을 생각하면, 포루스가 자랑하는 코끼리 부대는 몸집이 더 큰 것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한니발의 코끼리가 자신을 부리는 종자 겸 전사 1명만을 태웠던 데 반해 포루스의 전상은 종자 외에 3∼4명의 전사를 태웠다고 한다.

포루스의 명령 한마디에 전상 부대가 포효하며 출진하였다. 특대형 나팔 같은 포효에 대지를 뒤흔드는 2백 마리의 거구들. 이들이 기병대 속으로 난입한다면 말들이 두려움에 날뛸 것이다.

알렉산드로스가 기병대를 이끌고 돌진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보병대가 전진했다. 결전 병력으로 남겨둔 팔랑크스를 뒤에 둔 마케도니아군 산병들이, 돌진하는 전상 가까이로 달려갔다.

코끼리에 얹은 가마에서 투창과 화살이 비 오듯 쏟아져내린다. 이를 소형 방패로 막으면서 마케도니아군 산병이 맹렬하게 공격을 개시했다. 화살이 날고 투석기가 바람을 가른다. 가속력이 생긴 돌덩이가 종자를 맞추어 떨어뜨리고 화살이 코끼리의 피부를 뚫는다.

종자를 잃은 코끼리가 분노의 포효를 올리며 뛰어다닌다. 그래도 포루스 왕은 열심히 지휘를 계속하였고, 통제가 가능한 코끼리들은 마케도니아군의 전열을 짓밟으며 날뛴다. 그러나 산병들은 전상이 기병으로 향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산병의 목적이었다.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한 인도 기병대는 맹렬하게 반격에 나섰다. 그러나 가벼운 창밖에 가지지 못한 인도 기병은 마케도니아 중기병의 적수가 아니었다. 인도군 기병대는 다시 뒤로 밀려서, 하필 미쳐 날뛰는 코끼리 쪽으로 돌아왔다.

전상 주위에는 양쪽의 병사들이 뒤섞여 있었다. 코끼리는 이리저리 날뛰었고, 그 굵은 다리에 깔린 병사들은 절규를 했다. 마케도니아군과 인도군 너나 할 것 없이 수많은 병사들이 코끼리에 밟혀 죽었다.

그러나 이즈음, 도하 지점에서 코끼리의 모습이 사라진 것을 본 크라테로스가 전군을 이끌고 얕은 곳으로 건너왔다. 모든 병력을 전방에만 집중하고 있던 포루스 왕은 갑자기 측면에서 새로운 군대가 치고 들어오자 견뎌낼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 병력에 여유가 생긴 마케도니아군 산병은 교묘하게 코끼리를 유도하여 협익지로 몰아넣고는 한 마리씩 죽여갔다.

예비대 투입이 승패를 갈랐다. 예기치 못한 측면 공격은 인도군의 전열을 무너뜨리고 마침내 포루스 대왕의 대군은 전면적인 붕괴로 치달았다.

그러나 역시 포루스는 호걸이었다. 사령탑으로 삼은 거대한 코끼리를 몰면서 미친 듯 날뛰는 포루스의 모습에 감동한 알렉산드로스는 예를 다하여 포루스를 대하였고, 포루스 역시 알렉산드로스의 협기에 감동하여 검을 내미니, 두 사람은 친한 친구가 되었다.
마케도니아군 좌익의 기병대가 인도군 우익의 측면을 원거리 공격한다. 기동력이 떨어지는 인도군 전차대는 궤멸, 좌익 기병대도 큰 혼란에 빠진다.
좌익을 구원하러 간 인도군 우익 기병대의 배후를, 우회한 마케도니아군 중기병이 공격한다. 그리고 중기병 일대를 이끈 알렉산드로스가 단숨에 인도군 보병의 좌측을 공격한다.
열세인 인도군은 전상을 돌진시킨다. 동시에 기병대도 역습에 나서지만 반격을 당하여 전상 부대 쪽으로 밀려난다. 마케도니아군은 산병으로 원거리 공격을 가하면서 중장보병이 돌격한다.
양군이 뒤섞여 난전을 벌이는 가운데 마케도니아군 예비대의 크라테로스가 강을 건너 인도군의 측면을 친다. 이에 인도군 전체가 붕괴하게 된다.





페르시아를 정복한 후 알렉산드로스는 통일 그리스 및 페르시아의 왕이 아니라 아시아의 왕이 되고자 했다. 그는 페르시아 동북부 지방 박트리아 공주인 록사네와 결혼하고, 기원전 327년에는 카이바르 고개를 넘어 인도를 정복하기 위해 나섰다. 이미 중단할 줄 모르는 정복자가 되어버린 그는 마치 지구 끝까지 정복하려는 듯 커다란 야욕에 빠져 있었다.


펀자브 지방에 들어선 그는 인더스 강 지류인 히다스페스 강에서 그의 진군을 막는 인도의 포로스 왕과 일전을 치르는 상황에 처했다. 키가 210㎝가 넘는 거인 포로스는 보병 30,000명, 기병 4,000명, 전투용 마차 300대, 코끼리 200마리를 보유하고 있었다. 인도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총 병력은 75,000명 정도였으나, 기원전 326년 히다스페스 강에서 그가 지휘할 수 있는 병력은 보병 15,000명과 기병 5,000명에 불과했다.


포로스군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먼저 히다스페스 강을 건너야 하는데, 강은 깊고 물살도 빨랐다. 더구나 코끼리들은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알렉산드로스의 말들이 그들을 보고 놀라 뗏목 위에서 뛰쳐나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직접 강을 건너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로스는 적을 속이는 계략을 쓰기로 했다. 먼저 기병대로 하여금 매일 강변을 오르내리며 곧 도하작전을 취할 태세를 보였다. 그때마다 포로스는 코끼리를 움직여 대비하더니 며칠 뒤에는 더 이상 속지 않겠다는 듯이 자신의 진영에 그대로 머물렀다. 또한 알렉산드로스는 역정보 작전을 펴 강물이 얕아질 때까지 도하작전을 연기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그밖에 자신과 같은 옷을 입힌 병사를 포로스가 볼 수 있는 곳에 고정시켜 포로스가 딴 곳에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다가 그는 폭풍우 치는 날 밤을 이용해 주력을 이끌고 북쪽 17마일 지점으로 이동, 그동안 준비한 장비를 이용해 드디어 도하했다. 이튿날 아침 도하소식을 들은 포로스가 병력을 보내 수비하도록 지시했을 때는 이미 때늦은 상태였다. 포로스는 원 위치에서의 도하를 막기 위해 일부 부대만 남겨놓고 주력으로 하여금 알렉산드로스 군을 향하도록 했다.
포로스군은 알렉산드로스 군을 수적으로는 능가했으나 기습을 당한 상황에서 서둘러야 했으며, 알렉산드로스는 그러한 인도군의 약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그는 우선 우익의 우세한 기병을 이끌고 포로스의 기병과 전투용 마차를 격파했다. 그러는 동안 부하 장수 코에노스로 하여금 좌익 기병을 이끌고 인도군 배후를 공격하도록 했다. 또한 척후병으로 하여금 코끼리를 모는 병사들을 쏘아 떨어뜨리게 했다.
알렉산드로스의 기병은 인도의 기병을 코끼리 부대가 위치한 곳까지 몰아붙였으며, 그러자 공간이 좁은 상태에서 코끼리들이 이리저리 선회하면서 인도군 보병들을 짓밟는 사태가 빚어졌다. 그 후 인도군은 마케도니아군의 기병과 보병들이 사용하는 장창에 맥없이 무너지고 너도나도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포로스도 부상당한 채 붙잡혔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앞에 끌려와서 "어떤 대우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왕으로 대우해달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에 감명받은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왕으로 복귀시키고 곧 친구로 만들었다.


그리스에서 인도까지 약 18,000㎞를 진군한 알렉산드로스는 갠지스 강 계곡에 진입하기 전에 대원정을 마쳤다. 끝도 없고 낯설기만 한 두려운 땅으로 들어가는 데 대해 병사들이 모두 지쳐 있었고 너무나 고향을 그리워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진군을 중단하고 귀환 길에 나섰다. 귀환하는 도중 기원전 323년 그는 바빌론에서 병사했다.


33세의 짧은 인생을 누렸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군사적으로 세계사에 가장 위대한 장군으로 평가될 만한 업적을 남겼다. 그것은 모두 그의 사려 깊은 계획, 신속 과감한 결단력, 뛰어난 전략, 정교한 전술, 그리고 비범한 리더십으로 이루어낸 것이었다. 정치 · 경제 · 문화적으로도 그의 대원정은 고대세계에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이정표를 세웠다. 그는 70개국 이상의 도시국가들을 정복하면서 헬레니즘 문명과 아시아 문명을 융합시켰다.


[네이버 지식백과] 히다스페스 강 싸움 - 인도의 코끼리 부대를 이기다(BC 326년)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2010.7.16, 가람기획)


참고사이트





2014년 6월 28일 토요일

[BC216]칸나에 싸움

전쟁사에서 기원전 216년의 칸나에(Cannae) 전투만큼 군인들을 매료시킨 전투는 없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군사이론가들과 전략수립가들 가운데는 칸나에 전투의 마술을 터득하려 노력하고, 그 비법을 자신들의 전장에 적용하려 한 자들이 많았다.

기원전 216년 로마에서는 아에밀리우스 파울루스(Aemilius Paulus)와 테렌티우스 바로(Terentius Varro) 두 통령이 선출됨으로써 파비우스 전략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공격적이고 자존심 강한 로마인들이 그런 소극적인 전략에 만족할 리 없었다. 두 통령이 격일로 지휘권을 교대하는 제도 하에서 성미 급한 바로는 자기가 지휘하는 날을 이용해 한니발을 공격함으로써 다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한니발로서는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니었다. 오래 끌면서 부하들이 탈주하지 않을까 우려하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8월 하순 한니발은 칸나에에서 보급창고를 노획하고 아우피두스 강(지금의 오판토 강)을 사이에 두고 로마군과 대치하고 있다가 어느 날 로마군 제1진영이 위치한 곳으로부터 약 9㎞ 떨어진 강 남쪽 제방으로 진영을 옮겼다. 그리고는 바로가 지휘하는 날 새벽, 강 북쪽에 위치한 로마군 제2진영을 공격했다. 이때 바로도 로마군 주력을 도하시킴으로써 결국 양군은 강 북쪽으로 가서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이는 한니발이 그의 기병이 잘 싸울 수 있는 전투 장소를 이미 선정해놓고 그곳으로 적을 유인하는 교묘한 술책을 사용해 이루어진 결과였다.

결국 강을 측면에 두고 로마군(보병 65,000명과 기병 7,000명)과 한니발 군(보병 35,000명과 기병 10,000명)은 전투대형을 갖추고 대치했다.






바로는 한니발 군에 대한 포위는 어렵다고 판단하고 종심을 강화해 적 중앙을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각 중대 대형을 10×12에서 12×10 형태로 바꾸고 또한 3개 전열에 대해 각 전열 간의 거리를 좁혀 보다 조밀한 밀집대형을 취했다. 이런 새로운 시도에 신병들은 잘 적응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군은 무엇보다도 그들 군대의 특성인 기동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보조적인 기병은 우측방에 2,400명, 좌측방에 4,800명을 배치했다.

한니발은 로마군의 배치를 보더니 곧 그 약점을 활용하는 구상을 떠올렸다. 우선 강 제방의 약한 로마 기병에 대해 정예부대인 스페인 및 갈리아 출신 8,000명의 기병을 배치해 결정적인 순간에 신속히 그들을 제압하고 바로 군의 후방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동안 나머지 기병 2,000명은 우측방을 견제하도록 했다.

기병 운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보병을 잘 배치하는가였다. 한니발은 마라톤 전투와 같은 '약 중앙 강 양익' 대형에 의한 양익포위를 구상했다. 로마군이 중앙으로 빽빽이 집결한 것을 최대로 활용하는 작전이었다.

그리하여 중앙에 그다지 정예병이 못되는 스페인 및 갈리아 출신 보병을 배치하고 양익에 최정예 아프리카 보병들을 배치했다. 좌익 기병부대 지휘는 유능한 장군이었던 아우 하스드루발에게 맡기고 한니발 본인과 아우 마고는 비교적 취약한 중앙보병을 지휘했다. 주력부대는 아니지만 중앙보병의 전진 및 후퇴 기동은 상황을 정확하게 읽으며 기술적으로 진행해야 할 중요한 작전이기 때문에 한니발 자신이 맡은 것이다.

전투 직전에 바로는 또 다른 과격한 조치를 취하고 제1전열 내 여러 틈새에 제2전열을 투입하더니 전투가 개시되자 제3전열까지 투입했다. 그리하여 로마군은 기동성과 신축성을 잃고 오히려 그리스 방진 형태로 바뀌었다. 바로의 머릿속은 중앙에서 최대의 충격력을 발휘하겠다는 일념 외에 다른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리석은 조치는 로마군의 대혼란을 자초했으며, 점점 한니발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든 꼴이었는데, 이 사실을 바로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모든 상황은 한니발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우매한 바로가 그렇게 되도록 도와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앙군만 움직여서 로마군을 유인하고 난 다음 결정적인 순간에 한니발은 양익 보병을 전진시켜 적을 포위하도록 명령하고, 동시에 하스드루발에게도 기병 공격을 명했다. 그리고 로마군에 대한 삼면 포위를 이루면서 중앙 보병에게도 공격하도록 했다.

로마군 집단은 너무나 밀집돼 있어 무기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완전 포위를 당하자 삽시간에 대형이 무너지고 아비규환의 집단으로 변했다. 병사들은 공포에 질려 각각 자기 목숨만 건지려 애쓰고, 통령 · 호민관 · 원로원 의원 출신 장군들도 서로 도망가려 안간힘을 썼다. 전투 후 전장에서 주워 모은 로마귀족들 소유의 금팔찌만 해도 엄청났다.

그날 오후 내내 전장은 비참한 대살육장이 되었고, 약 50,000명의 로마 병사들이 죽었다. 그들은 대부분 도망갈 틈이 없는 상태에 놓여 있어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반면 카르타고 군의 전사자는 5,700명이었다.

이튿날 한니발은 부하들에게 전리품을 줍도록 허용하면서도, 전장에 깔린 시체들의 참상과 무더위 속에서 풍기는 시체 썩는 냄새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칸나에의 섬멸전은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를 거둔 한니발의 창의력과 주도면밀한 양익포위전술, 그리고 탁월한 통솔력 및 추진력으로 이루어진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생각하면 한니발과 같은 명장이 나온 것은 바로와 같은 우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전쟁사에서 승리는 패배한 측의 과오와 우둔함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흔하다.

칸나에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한니발은 본국 정부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하고 결국 기원전 203년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이듬해 군사력을 재건한 로마군이 아프리카를 침략하고 한니발은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다. 한니발이 아무리 군사적 천재라 하더라도 국가가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있을 때 홀로 그 군대의 운명을 살려낼 수 없었다. 그러나 로마 정부는 한니발이 유배지에서 죽을 때까지 결코 안심하지 못했다고 한다. 로마의 손길이 뻗쳐오자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칸나에 싸움 - 전사상 포위섬멸전의 대명사(BC 216년)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2010.7.16, 가람기획)


자마전투



자마전투


2014년 6월 22일 일요일

[BC3세기]카르타고 군대와 한니발



무적의 로마 군단이 이탈리아 반도뿐만 아니라 서지중해 일대를 석권하던 시절에 로마군에 강력히 도전해 한때 그 콧대를 크게 꺾었던 군대는 유럽이 아닌 아프리카의 군대였다. 바로 기원전 3세기 카르타고 군대였다.

본래 페니키아 인들이 기원전 814년 오늘날 북아프리카 튀니스 만 지역에 세운 카르타고는 상업도시국가로서 해상무역을 통해 부자 나라로 성장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매우 불안정했고, 토착민들로부터도 큰 지지를 받지 못했다. 더구나 인구가 적어서 자기 시민만으로는 군대를 구성하기가 어려웠다. 만일 성인남자를 군대에 동원해 전쟁에 내보냈다가 그들이 죽게 되면 도시 상가는 모두 문을 닫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카르타고는 축적한 부를 이용해 외국용병들을 들여오고, 그들로 하여금 전쟁을 수행하도록 했다. 따라서 평시에 상비군은 없었고 전시에만 용병군대에 의존했다.

카르타고 군은 로마 군단과 비교할 때 조직 · 훈련 · 무장 등 모든 면에서 열세였다. 카르타고 군은 고급사령부 · 기병 · 근위병 등을 제외하고는 주로 스페인 · 갈리아 · 누미디아를 비롯 기타 지역 출신의 용병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용감한 군인들이었으나 충성심이 결여되었고, 따라서 집단적으로 반란에 가담하거나 탈출하는 사태가 잦았다. 또한 보다 많은 보수를 지급받고자 하거나 다른 불만이 있을 때는 주저하지 않고 반기를 들었다. 이들을 지휘하는 장군은 카르타고 인 출신이었으나, 일반적으로 군사적 능력보다는 돈이 많은 사람이 선출되고 또한 자주 경질되었다.

공격전술은 그리스 방진의 전법과 비슷했으나 이탈리아의 산악지형에는 적합하지 않았고, 무기는 각 용병 출신별로 다양했다. 장창 · 단창 · 투창 · 검 · 도끼 · 활 등 무기를 잡다하게 사용, 무기체계가 통일되지 않았다. 다만 용병 가운데서도 누미디아 기병은 매우 우수했다. 지칠 줄 모르는 기질을 지닌 그들은 저돌적인 공격을 좋아했고, 그들이 타는 말조차도 용감하고 강인했다.







결국 로마군과 카르타고 군의 제1차 포에니 전쟁(BC264~241)에서 열세한 카르타고 군은 크게 패배해, 시칠리아 · 사르디니아 · 코르시카 등 지중해상의 전략적 요충들을 모두 상실하고 말았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그러나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완전한 역전을 이루게 되는데, 이는 전적으로 걸출한 명장 한니발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니발은 도저히 통합이 어렵다고 여겨지던 카르타고 군의 이질적 요소들을 오히려 한데 모아 더 큰 힘을 발휘하도록 하고, 병사들을 고무시키고 자기를 따르게 하는 비범한 통솔력을 가졌으며, 적의 약점을 최대로 활용하는 혜안을 소유한 군사적 천재였다.

스페인과 갈리아 지방에서 명성을 떨친 후 일약 최고사령관으로 승진한 한니발은 카르타고 인들의 숙원사업인 로마 정복에 나서 원정부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갔다. 당시 어느 누구도 육로를 통해 이탈리아를 공격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탈리아 침략에 앞서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한니발은 본국에 스페인 용병을, 스페인에 누미디아 용병을 교차 배치했다. 반란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본래 로마의 전략은 군을 이분해 각각 카르타고와 스페인에 원정군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니발의 기습적인 알프스 횡단 소식을 듣고는 곧 전군을 모아 한니발에 대항하도록 했다. 하지만 카르타고 군과 로마군 간에 벌어진 북부 이탈리아의 트레비아 강 전투(BC218)트라시메네호 전투(BC217)의 양대 전투에서 로마군이 대패, 로마 정부와 시민들은 크게 놀랐다.

로마군은 단순히 정면 대결하여 힘을 겨루는 방법에만 숙달되어 있었기에, 기습과 기만의 천재 한니발의 의표를 찌르는 작전에 속수무책이었다. 로마인들은 한니발에 대해 정정당당하지 못하다고 비난했지만, 그것은 단지 패자의 변명에 불과했을 뿐이다.

정보대를 이용하여 적의 배치를 완전히 파악하고, 지형을 최대로 활용해 함정을 만드는 한니발의 전법은 매번 적을 당황케 했다. 급기야 로마군은 공포감에 빠져서 기습소식만 듣고도 도망병이 속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어려울 때 기습 · 패배 · 공포 · 도주로 이어지는 것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법인데, 바로 그런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후 로마는 전장에서 한니발을 피하고, 그 대신 로마 지도자 파비우스(Quintus Fabius)의 주장에 따라 지연전을 전개하여 한니발을 지치게 하는 전략을 택했다. 로마인들은 한니발로 인해서 그들이 자랑하는 로마 군단의 전통과는 배치되는 전략개념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후 사람들은 전쟁에서 이용되는 지연전 위주의 전략을 '파비우스 전략'이라고 불렀다.
[네이버 지식백과] 카르타고 군대와 한니발 - 북아프리카 군대가 로마 군단을 격파하다(BC 3세기)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2010.7.16, 가람기획)

칸나이전투

트레비아 강 전투(BC218)

트라시메네호 전투


[BC4세기]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과 페르시아 정복




"역사상 그는 최고로 생산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기존의 문명 세계를 다른 곳에 들어올려 놓고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가 이룬 수준만큼의 업적은 다시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역사가 탄(W. W. Tarn)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대해 내린 평가다.

알렉산드로스가 그의 짧은 생애(BC357~323) 동안 이룬 업적은 하나의 전설과 같다. 특히 전쟁사에서 그가 보여준 능력과 업적은 실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추앙받고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약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장군들도 약점을 보이게 마련이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군사 분야에 있어서 그야말로 완벽했다.

그는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의 아들로 아버지가 그리스를 제패한 뒤 암살당하면서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사실 필리포스 2세가 너무 절묘한 시기에 암살당한 탓에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어머니 올림피아스가 암살의 배후가 아니냐는 의혹이 당대에도 제기되긴 했다. 필리포스 2세가 애첩에게서 낳은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위기감을 느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어머니 올림피아스가 암살을 사주했을거란 소문이 나돌았지만. 증거가 없는 관계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왕위에 즉위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즉위하자마자 보여준 천재적인 군사적 재능을 감안한다면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을 필리포스 2세가 꺼린 것이 이상한 일이지만 그때까지 알렉산드로스는 아직 소년에 불과했기 때문에 군사적 중책을 맡은 적은 없었고 따라서 필리포스가 알렉산드로스의 전설적인 군사적 재능을 완전히 꿰뚫어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당시의 정세를 감안하면 어쩌면 필리포스는 알렉산드로스에 대해서는 언제나 그를 다른 후계자로 교체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할 가능성이 충분한 상태였다.

우선 알렉산드로스는 사춘기로 접어들면서부터 필리포스 2세와 내내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순수한 마케도니아인이 아닌 혼혈인 반면 필리포스의 후실이었던 클레오파트라가 낳은 아이는 순수한 귀족 마케도니아인이었다. 이 때문인지 필리포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결혼식때 필리포스의 측근이자 클레오파트라의 삼촌이었던 아툴루스라는 장군은 '이 결합으로 인해 마케도니아의 훌륭한 후계자가 태어나길 바랍니다'라고 축원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알렉산드로스는 분노하여 '넌 내가 안보이냐'라고 소리를 친 뒤 술잔을 던졌는데 이에 분개한 필리포스는 알렉산드로스를 향해 칼을 빼들기도 하였다. 그 뒤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어머니는 추방당하는 신세가 된다.

후에 클레오파트라가 사내아이를 낳았고 이대로 가다간 알렉산드로스의 왕위계승은 절망적인 상황이나 다름없어보였다. 그러던 것이 필리포스가 암살을 당함으로써 극적으로 반전이 된다. 사실상 필리포스의 암살은 알렉산드로스에겐 대단한 횡재였는데 이 때문에 증거는 없지만 현재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반쯤 암살범 취급 당하는 것 같다.

필리포스가 죽었을 당시 그는 누구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내분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다행히 군대가 알렉산드로스를 왕으로 지지하였고 따라서 그는 마케도니아 왕으로 등극한다. 그가 군대의 신임을 얻은 이유는 그나마 다른 왕자에 비해 필리포스의 군에 종군한 경험이 많았기 때문...필리포스가 테베아테네의 연합군을 꺾은 카이로니아 전투에선 알렉산드로스가 좌익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물론 고작 18세에 불과했던 그는 그냥 얼굴마담이고 실질적인 지휘는 부하 장군들이 한 것으로 보이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왕위에 오르자 자신과 왕위 계승을 다퉜던 왕자들을 모두 죽였는데 이를 보면 그의 원한이 얼마나 사무쳤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알렉산드로스에게 가장 위협이 되었던 애첩 클레오파트라는 딸과 함께 산채로 태워죽었다고 한다. 물론 이건 알렉산드로스의 어머니가 제멋대로 저지른 일로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듣고 노발대발 하였다.

클레오파트라를 붙여준데다 추방의 계기가 되었던 축사를 해서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던 장군 아툴루스는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가족 전체가 쑥대밭이 된다. 우선 아툴루스는 처형당하고 그의 가족들도 모두 죽음을 당한다. 그의 아들만이 용서받았는데 그 이유는 알렉산드로스의 어머니인 올림피아스가 그에게 독을 먹여 정신이상자가 되었기 때문...

어쨌든, 실컷 분풀이를 끝낸 알렉산드로스는 곧바로 그리스 전체의 반란에 직면하게 된다. 괴물급인 필리포스 2세가 죽고 갖 20세에 불과한 애송이가 왕위에 올랐으니 반란을 일으킬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필리포스 2세에게 진압당한 뒤 강제로 코린트 동맹으로 묶여있었다. 이때 알렉산드로스의 측근들은 모두 외교로 해결하라고 조언하였으나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기병 3천명만 이끌고 신속히 남하한다. 이러한 전격전으로 인해 마케도니아의 가장 가까이에 있던 폴리스인 테살리아가 가장 먼저 제압당했고 테살리아의 병력을 인수한 알렉산드로스가 남하하자 모든 그리스의 도시들이 사절을 보내 용서를 구하고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에게 모두 죄를 묻지 않는 선처를 베푼다.

일년 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를 공격하기 전에 우선 북쪽 국경을 안전하게 해두고 싶어서 지금의 이스탄불 북동쪽에 위치한 트라키아인들을 공격하여 제압해둔 뒤 도나우 강까지 올라가 그 곳에 위치하고 있던 게타이(훗날의 다키아) 부족을 격파한다. 그때 일리리아(그리스의 서쪽, 이탈리아와 아드리안 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지역)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알렉산드로스는 즉각 그 지역으로 이동하여 반란을 일으킨 세력을 모두 진압한다. 그때 알렉산드로스가 전사했다는 소문이 그리스에서 퍼졌고 따라서 테베와 아테네가 반란을 일으킨다. 알렉산드로스는 즉각 남하하여 우선 테베를 포위했는데 테베인들은 결사적으로 항전하였다. 그러나 결국 테베는 점령당했고 알렉산드로스는 테베를 완전히 파괴하고 주민들을 모두 노예로 팔아버려 아테네와 쌍벽을 이루었던 강력한 도시인 테베는 비참한 종말을 맞이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 필리포스 왕으로부터 최고의 군대를 유산으로 물려받고 그의 밑에서 군사지휘에 관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필리포스의 단순한 계승자 차원을 넘어서 전략 전술에서 페르시아 · 그리스 · 마케도니아 세계의 어떤 선구자보다 앞서는 개념과 실천력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버지 필리포스와 어머니 올림피아스를 각기 신 가문의 후손으로 생각했으며, 따라서 자신을 신의 아들로 여겼다. 즉, 필리포스의 선조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이고 올림피아스의 선조는 아킬레우스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어머니로부터 "너는 제우스의 아들이다"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다. 사연인 즉, 올림피아스는 결혼 전날에 벼락을 맞는 꿈을 꾸었는데, 그때 제우스의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헬레스폰토스(다르다넬스 해협)를 건너 처음 아시아 땅에 들어섰을 때 자신의 창을 땅에 힘차게 꽂으며 "신들로부터 나는 아시아를 받아들이노라, 창으로 얻은 승리와 함께"라고 소리쳤다. 아시아 원정은 아버지의 계획을 물려받은 일 이상으로서, 그는 신으로부터 받은 사명으로 생각했다. 페르시아의 침공에 대해 복수하고, 소아시아 지방 그리스인들을 해방시키며, 나아가 아시아를 지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왕으로 취임한 2년 후인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는 세계 최고의 군대인 보병 32,000명과 기병 5,100명을 거느리고 아시아 원정에 나섰다. 1차적 목표인 페르시아 점령을 위한 그의 전략계획은 페르시아가 바다를 장악하고 있는 한 자유로워질 수 없기 때문에, 먼저 소아시아 지방을 정복하고, 이어서 그곳으로부터 이집트에 이르는 지중해 연안의 페르시아 해군기지를 장악해 페르시아 해군력을 무력화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해전을 실시하지 않고도 해군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최상의 전략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단지 180척의 군함밖에 없는 데 비해 페르시아 함대는 400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저런 바쁜 군사활동을 단 일년만에 마무리 지은 알렉산드로스는 다음해에 드디어 군대를 이끌고 헬레스폰트를 건넌다(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를 가르는 좁은 해협, 페르시아의 크레스크세스가 대군을 이끌고 건넜던 바로 그 곳이다.).

알렉산드로스가 상륙하자 그 지방의 페르시아 사트라프(태수)들은 각각의 군대를 끌고 나와 합류한 다음 그라니쿠스라는 곳에서 알렉산드로스와 조우하였다. 이들은 강을 사이에 두고 포진하여 알렉산드로스의 진격을 저지하려 하였다. 알렉산드로스의 부하장수들은 밤에 강의 상류 지역으로 올라가 건너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알렉산드로스는 허를 찌르기 위해 자신의 기병대로 즉각 도강하여 공격하였다. 알렉산드로스가 그렇게 대담하게 강을 건너 공격할 줄은 예상못한 페르시아군은 완전히 격파되고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에서의 첫 전투를 대승으로 마무리 짓는다.

이 싸움의 승리로 인해 아나톨리아의 서부 지역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된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보단 그리스와 친한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계 폴리스들을 회유[8]하며 거침없이 남하한다. 그는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을 해안선을 따라 쭉 돌면서 점령하며 내려왔는데 이는 항구도시들을 모두 장악함으로써 페르시아 해군을 고사시키기 위해서였다. 마케도니아군은 해군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만이 페르시아 해군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페르시아 해군은 그리스 출신의 멤논이라는 사령관의 지휘를 받아 마케도니아군의 보급선을 끊으려 했으나 거의 성공할 무렵 멤논이 갑자기 병으로 죽은 데다 항구도시들이 마케도니아군에게 점령되면서 해체되었다.

알렉산드로스가 1차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4년이 소요되었다. 헬레스폰토스를 건너 소아시아에 진입했을 때 페르시아 왕조는 즉위한 지 얼마 안 되는 다리우스 3세 치하에서 혼란을 겪고 있어 알렉산드로스는 쉽게 교두보를 건설할 수 있었다. 그는 친히 고대 트로이 유적을 방문하고 그의 시조인 아킬레우스의 무덤을 찾아가 예의를 갖췄다.

기원전 334년 그라니코스 싸움, 기원전 333년 이수스 싸움, 기원전 332년 티로스 싸움에서 알렉산드로스 군대는 비록 숫자는 많지만 여러 면에서 뒤떨어져 있던 페르시아 군대를 모두 물리치고 승리했다. 페르시아군의 가장 큰 약점은 기병과 보병 간 협조체제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반면 마케도니아군은 필리포스가 개발한, 보병과 기병의 협동을 기초로 하는 '망치와 모루' 전법에 숙달되어 있었다. 마케도니아군은 먼저 보병 지원을 받지 못하는 페르시아 기병을 공격하고, 그 다음에는 기병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보병을 공격함으로써 적을 조직적으로 격파했다.

이수스 싸움을 좀더 자세히 보자.
아나톨리아 서부를 제압한 뒤 겨울을 나고 23세가 된 알렉산드로스는 봄이 되자 시리아 쪽을 향해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시리아에 진입하기 위한 관문인 이소스라는 곳에서 그는 다리우스 3세가 그동안 열심히 모아 두었던 페르시아의 대군과 조우한다. 다리우스 3세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였고 총 병력은 11만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4만여 병력이었기 때문에 병력상으론 알렉산드로스가 불리하였다.

그러나 이소스는 의외로 좁은 평야였고 따라서 적은 병력을 가진 알렉산드로스에게 유리한 지형이었다. 다리우스가 굳이 이런 곳에서 싸우기로 한 이유는 불명확하다. 아마도 다리우스가 병력의 우세에 우쭐했을 수도 있고 다리우스가 터키 지역의 침략을 일년간이나 방관한 것을 변명하기 위해 조급하게 싸움을 서둘렀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학자들에 따르면 페니키아 지역에 있는 도시들이 알렉산드로스의 접근으로 인해 상당히 소란스러웠다고 하였는데 이는 즉 다리우스가 늑장을 부린 것 때문에 그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많이 잃은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이소스 전투초기에 다리우스 자신의 병력을 강 북쪽으로 포진시킨 뒤 알렉산드로스가 강을 건너면 공격할 생각이었다. 게다가 이소스에 포진함으로써 알렉산드로스가 점령한 터키 지역과 그의 본대의 길목을 차단하였으므로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의 주문대로 강건너 공격해야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초기엔 다리우스가 유리한 입장에 있게 되었다.

그런데 전투는 의외로 싱겁게 끝났는데 이는 알렉산드로스가 숫적으로나 전황으로나 불리한 상황을 보고 다리우스를 직접 노리기로 하였고 이 전술이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다리우스는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노리기 위해 보병의 우익에게 명령하여 페르시아군을 최대한 밀어내게 하였다.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가 그 긴창을 이용해 잘 밀어내자 페르시아 좌익과 중앙에 약간의 틈이 생겼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정예기병인 헤타이로이을 쐐기 대형으로 짠 뒤 자신이 그 꼭지점에 위치한 뒤 그대로 그 틈을 통과하여 다리우스를 향해 돌진하였다. 이에 다리우스는 혼비백산하여 달아났고 최고 사령관이 도주한 것을 본 페르시아군은 혼란에 빠져 격파당하고 만다. 이 전투는 후에 망치와 모루 전술의 기반이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전투 후 다리우스의 어머니, 아내, 딸들을 모두 사로잡았는데 그는 이들 가족을 매우 정중하게 대우하였다고 한다. 특히 다리우스의 아내는 역사서에 당대 최고의 미녀라는 기록이 남겨진 분인데 생포된 뒤 일년뒤 사산으로 목숨을 잃는다. 증거는 없으나 그 아이가 알렉산드로스의 아이라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생포된 다리우스의 두 딸 중 한명은 그대로 알렉산드로스의 아내가 되고 다른 한명은 알렉산드로스의 동성애자 상대로 알려진 헤파이스티온의 아내가 된다.

이소스의 패배 뒤 다리우스 3세는 강화를 제의하는데 이 제의는 알렉산드로스가 점령한 땅을 몽땅 양보한다는 것에 자신의 가족의 몸값으로 1만 탈렌트를 지불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지금으로 치면 대략 3천억원에 해당되는 거금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거절하며 자신은 아시아의 왕이므로 영토 분할은 자신의 권한이라고 답한다. 그의 마음속엔 이미 그가 페르시아의 왕이 된 것...이때 부하 장군인 파르메니온과의 대화도 유명한데 파르메니온은 '제가 알렉산드로스 왕이면 이 강화를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하자 알렉산드로스는 '내가 파르메니온이었으면 그랬겠지'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수스의 패배로 인해 시리아는 완전히 무방비로 노출되었고 알렉산드로스는 이 지역을 휩쓴다. 다음 해에 24세가 된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로 남하하였는데 이때 티레와 가자와 같은 도시들은 격렬하게 농성을 하였으나 모두 격파되고 이들 도시의 시민들은 모두 노예로 팔리고 만다. 도시 티레의 공성전은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유명한데 알렉산드로스는 이 공성전을 직접 지휘하면서 그가 회전 뿐만 아니라 공성전에서도 대단한 능력을 지닌 무결점 지휘관임을 입증하였다. 티레는 섬에 위치한 도시였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공략하기 위해 인공 길을 바다위에 만들고, 50미터에 해당되는 공성탑을 건설하고, 배에 공성충차를 실어 성벽을 타격하는 등 온갖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면서 이 도시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9] 이때 또다른 대도시인 예루살렘은 성문을 열고 알렉산드로스에게 즉각 항복하였는데 이는 페르시아에 대한 유대인의 반감때문에 그리하였다고. 로마 시대의 역사가인 요세푸스가 기록하길 알렉산드로스는 이때 다니엘 서를 접하고 이 서에 알렉산드로스가 그가 아시아를 제패하고 그의 사후 나라가 네개로 갈라질 것이라는 예언을 전해들었다고 하는데 이는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

이집트에 도착한 알렉산드로스는 그가 필리포스의 아들이 아닌 아몬 신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는다. 그는 이 신탁을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는데 자신이 제우스 신의 아들(그리스 인들에게 제우스 신은 아몬과 동일 신으로 여겨졌다.)이라는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 것을 기념하는 동전[10]까지 발행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각은 마케도니아 장군들을 곤혹스럽게 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들 대부분이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 필리포스에 의해 발탁된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교두보를 확보하고 페르시아군 해군을 무력화시킨 다음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대전략 목표인 페르시아군 격멸과 대제국 건설을 위해 그의 군대를 계속 진군시켰다. 그는 다리우스의 평화제의를 거절하고 기원전 331년 가우가멜라 싸움('아르벨라 싸움'이라고도 부름)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사실상 페르시아 군대를 거의 궤멸시켰다.

가우가맬라 싸움을 자세히 보자.
다음해에 25세가 된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에서 나와 동쪽을 향해 진군한다. 다리우스 3세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짜내 모은 9만 여의 병력을 이끌고 가우가멜라라는 곳에서 알렉산드로스에 맞선다. 이 전투에서 다리우스는 이수스때처럼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에게 돌진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 부대의 정예기병으로 알렉산드로스의 헤타이로이를 견제하도록 한 뒤 자신의 우세한 병력으로 마케도니아 군을 찌부려뜨리는 전술을 짠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헤타이로이 부대가 견제당하는 것을 알고 일부러 우익 끝까지 이동하여 페르시아의 별동대를 중앙에서 멀어지게끔 유인한다. 그러자 필연적으로 다리우스의 위치가 노출되었다. 이때 우익으로 유인된 헤타이로이를 견제하는 임무를 맡은 페르시아 기병은 우익에 위치하고 있었던 마케도니아 보병에 의해 붙들리게 되었고 이와 동시에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헤타이로이 기병은 그 견제에서 벗어나 방해받지 않고 다리우스를 향해 돌진하였다. 이수스 때처럼 다리우스는 또다시 공황에 빠져 달아났는데 이로 인해 승부가 또 결정되고 말았다.

이소스 때와 마찬가지로 가우가멜라 전투에서도 다리우스가 도망치기 전까진 페르시아군이 꽤 우세하였는데 특히 마케도니아의 좌익은 붕괴되기 직전이었다. 따라서 다리우스가 죽음을 각오하고 알렉산드로스의 돌진에 과감히 대항하였으면 그토록 어이없게 패배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리우스는 꽤 겁이 많은 성격을 가졌는지 조금만 위협받으면 바로 도망쳤는데 그로써 알렉산드로스에게 손쉬운 승리를 선사한다.

이렇게 다리우스의 겁이 많은 성격은 전투시 가장 선두에 서는 알렉산드로스와 대조된다. 알렉산드로스는 아예 한술 더떠 이소스나 가우가멜라 전투에선 헤타이로이 기병대를 쐐기 대형으로 짠뒤 자신이 그 꼭지점의 끝에 자리잡고 적진을 항해 돌격하였다. 쐐기 대형의 꼭지점 끝은 당연하게도 사망할 확률이 제일 높은 위험한 자리이다.[11]

물론 이러한 위험한 행동은 마케도니아 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는데 특히 직접 지휘받는 헤타이로이의 사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높았다. 왕이 직접 가장 선두 끝에서 돌격을 이끄는데 누가 용기를 얻지 않겠는가? 그 때문에 헤타이로이 기병은 전투시 대단히 용맹하였고 그 때문에 그들이 이소스, 가우가멜라 전투의 승부를 결정짓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가우가멜라의 패배로 다리우스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이제 페르시아는 재기불능이 된 것이었다. 가우가멜라에서 동원한 병력은 다리우스가 동원할 수 있는 마지막 군대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를 꼭 사로잡고 싶었기 때문에 도망가는 다리우스를 맹추격한다. 그러나 다리우스는 달아나는 것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지 단숨에 자그로스 산맥을 돌파한 뒤 동쪽으로 자취를 감춘다. 다리우스를 놓힌 알렉산드로스는 대신 남하하여 바빌론에 입성한다.

바빌론을 방문한 뒤에 알렉산드로스는 수사에 입성한 뒤 다시 동쪽으로 진군하여 페르세폴리스에 진입한다. 페르세폴리스에서 알렉산드로스는 크세스크세스의 거대한 석상을 때려부순다. 뒤이어 페르세폴리스에 큰 화재가 발생했는데 이는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전쟁때 아테네를 불태운 것에 대한 복수로 고의로 방화했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설로는 왕궁에서 창녀들을 데리고 파티를 벌이던 중, 타이스라는 이름의 한 창녀와 내기를 벌이다 불을 놓는 바람에 페르세폴리스가 전소되어 괴멸했다는 것이 있다. 페르시아의 후예라 자부하는 이란에서는 거의 정설로 믿고 있는 듯. 다른 설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애인을 유혹할 속셈으로 페르세폴리스에 불을 놨다는 이야기도 있다. 혹은 실수였다는 설도 있고 바빌론을 수도로 삼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랬다는 설도 있으나 영국 BBC에서 만든 알렉산드로스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방화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한다. 적어도 우발적인 방화는 아니라는 것.

페르세폴리스를 점령한 뒤 알렉산드로스는 계속 동쪽으로 진군하여 다리우스의 추격에 나선다.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추격하는 대신 페르세폴리스에서 페르시아를 정복했다고 선언한 뒤 외교를 통해 페르시아 태수들을 회유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리우스를 생포하는 것에 집착하였는데 그 이유는 다리우스에게 정식으로 양위를 받아 페르시아 황제가 되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었다. 선양??

다리우스는 동쪽으로 달아나 다시 한번 병력을 모아 알렉산드로스와 대결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이미 다리우스에 대해 진절머리가 난 부하들이 다리우스를 배신하여 그를 사로잡는다. 이 반란을 지휘한 자의 이름은 베수스였는데 그는 다리우스의 친척이자 다리우스 외엔 가장 왕위 계승권에 가까운 유력 영주였다. 그는 다리우스의 지휘 능력에 대해 전혀 신뢰하지 않았고 이것은 다른 다리우스의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이에 따라 베수스는 다리우스에게 자신이 다리우스 대신 군대를 지휘하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를 이긴 뒤 다리우스에게 지휘권을 돌려주겠다고 말하였다. 다리우스는 이를 거절하였고 그러자 베수스와 그를 지지하는 장교들은 다리우스를 포로로 잡는다. 베수스는 다리우스를 소가 끄는 우마차 감옥에 억류해 두었는데 그때 알렉산드로스가 그의 작은 규모의 호위군과 함께 근처에 당도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혼란에 빠진 베수스는 달아났는데 이때 감옥에 있던 다리우스를 찌르고 달아났다. 알렉산드로스가 다리우스를 발견하였을때 다리우스는 이미 죽은 상태였고 따라서 꼭 생포하고 싶었던 알렌산드로스는 대단히 실망하였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를 페르세폴리스로 보내 매우 정중하게 장사지낸 뒤 베수스를 잡으려고 동쪽으로 계속 진군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가 숨이 끊어지기 직전 자신에게 페르시아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유언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페르시아의 새로운 왕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베수스는 페르시아 왕국의 반란자이므로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의 왕으로써 이를 진압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 때문에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쫒아 동쪽으로 계속 행군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동쪽으로 행군하면서 수많은 신도시를 건설하였고 이들을 모두 알렉산드리아라고 명명한다. 이 알렉산드리아들은 알렉산드로스가 꿈꾼 완벽하게 이상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한 일종의 시험작들이라고 추측된다. 실제로 이 도시들은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 문화가 어울리도록 조치하였고 그에 따라 당시 서방에서 모을 수 있었던 거의 모든 문헌을 수집 배분하여 도서관을 설치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는데 당시에 있어서 책의 가치를 생각해본다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것인지 알 수 있다.[12] 헬레니즘 문화의 발흥도 바로 이러한 배경에 의한 것이다.

세계 방방곡곡에 건설되었던 알렉산드리아는 모두 폐허가 되어 위치조차 알 수 없고, 현재까지 유일하게 살아남은 곳이 바로 이집트 제2의 도시인 알렉산드리아다. 터키의 항구도시인 이스칸데룬(Iskenderoun 또는 Iskenderun) 역시 그리스어로는 알렉산드렛타라고 불리며, 스스로는 알렉산드리아의 후신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학계에서는 멸망한 뒤 같은 위치, 혹은 인근에 세워진 새로운 도시라는 설이 유력하다.





알렉산드로스는 동쪽으로 행군하여 마침내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지역까지 오게 된다. 이 지역에서 베수스를 보호하고 있었던 사고디안 부족장인 스피타메네스는 베수스를 알렉산드로스에게 넘겨주고 강화를 맺기로 결정하였다. 사고디안 부족은 지금의 아랄해와 인도 국경 사이에 살고 있던 부족이었다. 베수스를 넘겨받은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코와 귀를 자르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는데 이는 페르시아가 반란자를 처형하는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이 지역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스키타이 부족과 전투를 치루었는데 사고디안 부족은 베수스를 넘겨주고 강화를 맺은 것을 백지화 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모두 진압하였고 사고디안 부족은 이를 주동한 그들의 부족장인 스피타메네스를 죽이고 알렉산드로스와 강화를 맺는다. 사고디안 부족을 격파한 뒤 알렉산드로스는 박트리아 지역을 공략하였는데 박트리아는 지금의 히말라야 산맥 서쪽 지역으로 인도와 꽤나 가까운 곳이다. 이 지역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록산느라는 박트리아 귀족 출신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데 그녀는 알렉산드로스의 첫번째 아내였다.

이때 알렉산드로스에 대해 여러 차례 암살 시도가 일어났었는데 놀랍게도 이러한 음모를 주도한 것은 모두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장교들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왕이 되었음을 선언한 뒤 페르시아 식의 궁중예법을 자신의 부하들에게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페르시아 예법대로라면 알렉산드로스를 만나려면 시종의 허가를 받아야 했으며 만나서는 우선 반지에 키스를 해야 했는데 마케도니아 장군들에게 있어 이러한 짓은 지나치게 비굴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로스는 관을 쓰고 페르시아 궁중복을 입으며 비위를 잘 맞춰주는 페르시아인들을 가까이에 두었었다. 게다가 논공행상 할 때도 많은 페르시아인들에게 높은 지위를 주었는데 마케도니아 장군들의 입장에서 많은 피정복민들이 그들과 동등한 직책을 맡은 것을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13]

이때 마케도니아의 장군이자 알렉산드로스 다음가는 사령관인 파르메니온은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암살당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아들이 알렉산드로스의 음모에 가담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파르메니온의 아들을 죽인 뒤 파르메니온의 군인들에게서 받고 있는 높은 신뢰는 알렉산드로스로 하여금 그를 매우 경계하게 하였으며 그 때문에 암살한 것. 일찍이 알렉산드로스를 페르시아로 건너온 뒤 벌인 첫번째 전투인 그라니쿠스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생명을 구한 바가 있는 클레이투스도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클레이투스는 알렉산드로스를 구한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나 알렉산드로스와의 오랜 친구이기도 했는데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황제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매우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때 마케도니아 장군들의 접근을 거의 허가하지 않았는데 아주 모처럼 그들을 모아놓고 술자리를 벌였다. 그는 모인 장군들에게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며 이는 자신의 아버지인 필리포스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클레이투스나 알렉산드로스 모두 이때 매우 취한 상태였는데 클레이투스는 이에 격분하여 알렉산드로스에게 맹비난을 퍼부우며 그는 업적은 그의 아버지인 필리포스 덕택이며 이것을 잊어선 안된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필리포스를 생까며 자신은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것에 도취된 알렉산드로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클레이투스를 내쫒으라고 명령하였으나 클레이투스는 말을 듣지 않고 계속 불평을 토로하였고 이에 알렉산드로스는 창을 가지고 클레이투스를 꿰뚫어 죽인다. 알렉산드로스는 다음날 술에 깬 상태에서 클레이투스를 죽인 것에 매우 후회하였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그렇게 마케도니아 장교들과 알렉산드로스의 불화는 점점 심해져가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런 상황에서도 계속 원정을 희망하였고 우선 인더스 강 서쪽, 지금의 파키스탄 서쪽 지역에 있던 지방 영주들을 소환하여 자신을 따르는 것을 보이라고 명령하였다. 많은 이들이 이에 응해 알렉산드로스에게 나아갔으나 몇몇은 거부하였고 알렉산드로스는 그들을 군사적으로 공격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러는 동안 심한 부상을 입기도 하였으나 그들을 모두 공략하는데 성공하였고 그에게 부상을 입힌 도시 시민들은 모두 학살당하고 빌딩까지 부숴 완전히 폐허로 만든다.

알렉산드로스는 파키스탄 지역을 공략한 뒤 인더스 강을 건너 인도 지역까지 공격하기로 하였는데 그렇게 한 이유는 동쪽 대륙의 끝까지 정복한 뒤 그 대륙의 끝자리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남기고 오겠다는 다소 허황된 계획 때문이었다. 그는 인더스 강을 건넌 뒤 남쪽에 위치한 파우라바라는 나라를 공격하였는데 이에 파우라바의 왕 포르스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왔다. 알렉산드로스는 대략 4만여 병력이었고 포르스는 5만여 병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다. 알렉산드로스는 병력의 일부를 본 진영에 남겨 대군이 머무르는 것처럼 위장한 뒤 밤에 몰래 강의 상류로 올라가 강을 건넜다. 포루스는 이에 주력을 이끌고 상류로 올라가 강을 건넌 알렉산드로스와 싸웠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우세한 기병(7천대 4천)으로 포르스의 기병을 격파하는데 성공하고 배후로 돌아가 포르스의 보병을 팔랑크스와 협공하는데 성공한다. 포르스는 용감하게 싸우다 결국 항복하였고 포르스의 용맹함을 높이 산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왕위에 그대로 앉히고 그가 알렉산드로스에게 충성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선에서 그를 풀어준다.

포르스를 격파하여 인더스 강 남쪽에 교두보를 확보한 알렉산드로스는 이때 자신의 죽은 애마인 부케팔로스[14][15]의 이름을 딴 부케발리아라는 도시를 건설한 뒤 이번엔 갠지스 강을 건너 인도 본토에 침입할 계획을 세운다.

이때 겐지스 강 남쪽엔 난다 왕조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 왕조는 포르스의 파우라바와는 달리 거대한 국가였다. 이 국가는 인도 북부를 통채로 지배하고 있었다. 포르스의 부하들은 마케도니아 인들에게 난다 왕조의 군사력을 말해주었는데 이들은 20만 보병, 6만 기병, 8천 전차대, 6천개의 코끼리 부대가 겐지스 건너편에 있다고 말하였다.

이런 사실을 들은 데다 너비가 6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강인 갠지스 강을 건너야 한다는 점도 있어 병사들은 알렉산드로스가 난다 왕조를 공격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였다. 이들을 파업을 벌였고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온갖 애를 써보지만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결국 서쪽으로 군대를 철군하기로 하였다.[16] 대체 이 사람이 끝까지 갈 수 있었다면 어디까지 갔을런지 궁금하다. 알렉산드로스 본인은 죽기 전 아라비아 반도 원정을 거쳐 북아프리카를 지나 이탈리아 반도에 이르는 원대한 중년기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글쎄…

사실 알렉산드로스가 한 말을 보면 회군한게 잘한 것일지도 모른다. 당시 알렉산드로스는 "인도는 코딱지만한 땅인데 지금 정복 안하면 언제 정복하겠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근데 알렉산드로스가 그동안 원정다닌게 다 이런 마인드로 한 것이라서, 회군하지 않았다면 진짜로 별 문제없이 정복 했을지도...(...)

인도 원정에서 되돌아온 알렉산드로스는 수많은 관료들이 부정축재를 한 것을 발견하였다. 이 관료들은 알렉산드로스의 성격을 볼 때 이토록 빨리 원정을 중단하고 병사들이 파업할 줄 누가 알았을까? 귀국할 줄은 예상못했고 또한 그들의 많은 자들은 알렉산드로스가 원정 도중 전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마음껏 부정축재를 벌인 것인데 이들 많은 수가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처형당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수사로 돌아가 그를 따라 종군했던 마케도니아 군에게 많은 급료를 주고 그들의 빚을 모두 대신 갚아 준 뒤 마케도니아로 귀국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한 이유는 마케도니아 군이 인도에서 파업을 벌였을 때 내세운 표면적 명분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기 때문...그러나 이것은 알렉산드로스가 오해한 것으로 사실 이들이 원한 것은 전쟁을 그만두고 싶은 것이었지 마케도니아로 가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들은 알렉산드로스 곁에 머물며 정복자로써의 혜택을 누리고 싶었지 얼마간의 퇴직금만 받고 마케도니아로 되돌아가 실업자 신세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오피우스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에게 직접 나아가 이들을 꾸짖고 몇몇 주동자를 처형하라고 지시한다. 그러자 마케도니아 군인들은 밤에 알렉산드로스가 있는 막사를 포위한 뒤 동틀때까지 목놓아 울었는데 결국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계획을 철회하고 이들을 모두 용서한 뒤 이들 전원에게 자신의 '일족'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영예를 주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이들과 함께 주연을 즐긴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뒤 마케도니아인들의 반발이 자신의 친페르시아 행보 때문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마케도니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을 융화시키기 위해 그 두 인종간의 집단 혼인식을 치르게 한다. 이때 페르시아 여자와 결혼한 마케도니아 남자의 수는 무려 1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17]. 알렉산드로스도 모범을 보이기 위해 이수스때 사로잡은 다리우스의 큰딸과 결혼한다.

이렇게 한 뒤 알렉산드로스는 헤파이스티온의 죽음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이로 인해 대단한 상실감에 빠지게 되었다. 그 뒤 얼마 안있어 알렉산드로스도 쓰러졌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고작 32세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쓰러질 전까지 건강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젋었기 때문에 아랍 원정[18]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쓰러진 것이었다. 쓰러지기직전 알렉산드로스는 해군 제독이었던 니아르케스와 파티를 한 뒤 아침이 될때까지 술을 퍼마셨었다. 그 뒤 알렉산드로스는 몸에 열이 나기 시작하였는데 그 고열은 계속되었다.

일주일 후 알렉산드로스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고[19] 그 다음날 마케도니아 군인들은 알렉산드로스의 건강에 무엇인가 이상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알렉산드로스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들 중 지위가 높은 몇 명만 만났는데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반기기 위해 간신히 손을 들어올릴 수 있을 뿐이었다.
이틀 뒤 알렉산드로스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있는데 일각에서는 암살설을 제기하기도 하고, 너무 젊은 시절에 이룰 걸 다 이뤄서 의욕상실로 병에 걸려 죽은 거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학설에서는 죽기 전에 포도주를 6.5리터 가량(그것도 원액)을 들이켜 마셔서 사망했다고도 한다.[20] 헤파이스티온도 과음 때문에 죽었다는 설이 있다. 그 외에 열병을 빨리 치료하기 위해 독성이 강한 약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신빙성은 거의 없는 야사이긴 하지만, 어느 지역에서 그에게 여자를 진상했는데, 그 여자가 소위 말하는 독인(어릴때부터 독을 먹여서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독살이 가능하다는 사람)이어서 그 여자를 안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는 설도 있다. 가장 유력한 학설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모기에 물리는 바람에 일종의 풍토병인 말라리아 감염설이 있고, 실제로 고대의 독살설이 제기되는 사람들 대부분은 동방의 풍토병이 의심되는 증세를 보이며 사망했다는 점 때문에 말라리아가 의심되곤 한다. 즉 가장 과학적인 방법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망원인을 분석하자면 이렇다.

원정을 갔다. → 직접 병력들 사이를 헤짚고 다니면서 지휘했다. → 니아르케스와 파티를 하면서 술을 퍼마셨다. → 술을 퍼마시는 도중 모기에게 물렸다. → 모기가 갖고있던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죽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이 워낙 급작스럽고 또한 그가 젋은 나이였으므로 그는 후계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때 록산느는 임신 중인 상태였는데 그녀의 뱃속의 유복자가 알렉산드로스의 유일한 아이었다.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장군들은 회의를 열어 이 아이가 사내아이로 태어날 경우 왕으로 삼자고 합의하였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보병들은 그들이 이 회의에서 배제되었다는 이유로 이 합의를 거부하고 알렉산드로스의 배다른 동생으로 간질을 앓고 있던 필리포스를 왕으로 추대한다.[21] 나중에 록산느가 결국 사내아이 알렉산드로스(알렉산드로스 4세)를 낳자 양측은 합의하여 이 아기와 필리포스를 공동 왕으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간질 환자와 갓난아기였던 이 둘은 허수아비, 꼭두각시, 괴뢰로 아무런 실권이 없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죽기 직전에 유언으로 가장 강한 자가 자신의 후계자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로마 시대의 역사가인 디오도루스가 그 출처이지만 그와 함께 알렉산드로스 시대 역사의 주요 소스인 아리아노스와 플루타르코스는 모두 알렉산드로스가 말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사후 마케도니아 제국은 이 유언 그대로 되고 말았다. 그에 부하들 중 가장 강한 자들이 나라를 나눠 가졌으니...

여담이지만 이를 두고 성서의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숫양과 숫염소에 대한 계시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다리우스 대왕을 비유한 것이라는 해석을 하는 종파도 있다.[22] 일단 날개 달린 표범처럼 빠르게 영토를 넓혔고, 후에 4개의 나라로 분열되었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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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과 페르시아 정복 - 전쟁사상 가장 뛰어난 군사적 천재(BC 4세기)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2010.7.16, 가람기획)

참고 사이트

그라니코스 전투

이소스 전투


티루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