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9일 일요일

[1315년]모르가르텐 전투

13세기 말까지 유럽인들 가운데서 십자군 원정의 값진 군사적 교훈, 즉 승리를 위해서는 보병과 기병의 긴밀한 공조체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제대로 깨달은 이는 드물었다. 유럽 내에서 여전히 중기병이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4세기에 들어서자 약 1,000년간 맹위를 떨친 기병의 몰락을 의미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창병 또는 궁수들로 구성된 보병이 기병과의 싸움에서 이기는가 하면, 대포 지원을 받은 보병이 기병을 무찌름으로써 전술상 대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유럽의 중기병이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첫 번째 사건은 1315년 모르가르텐(Morgarten) 전투에서 일어났다.
모르가르텐 전투(독일어: Schlacht am Morgarten)는 1315년 스위스 동맹군오스트리아를 무찌른 전투로 이 전투의 승리로 스위스가 독립을 했다.
1314년초 스위스 연방의 일원이었던 슈비츠 사람들이 이웃 아인지델른 대수도원을 약탈하자 이 지역의 지배권을 주장하던 오스트리아 공작인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 레오폴트 1세는 기사들을 모아 군대를 일으켰다.


1273년 스위스우리, 옵발덴, 슈비츠, 니드발덴 등 4개 주는 스위스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싸움을 준비했다. 이에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 왕 레오폴트 1세가 군대를 이끌고 스위스를 침공했다. 스트라스부르크의 오토 경이 좌측을 공격하고 뒤이어 루체른 성주가 호수를 넘어 스위스를 공격했으며, 레오폴드 1세의 대군이 주력 부대를 이끌고 스위스를 공격했다.
기병 위주로 편성된 오스트리아 원정군은 농민으로 이루어진 스위스의 창병들에게 마치 푸줏간의 고기처럼 도륙 당했다. 스위스군 2,000명과 오스트리아군 5,000명간의 소규모 충돌이었으나, 이 전투는 보병이 기병을 무너뜨린, 전쟁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스위스의 창보병들
스위스 보병은 과거로 돌아가 마케도니아 방진과 같은 대형을 유지하면서 싸운, 당시 유럽에서는 유별난 군대였다. 그러나 그러한 고전적 대형만으로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특수성은 오히려 그들이 사용한 주무기였던 미늘창(halberd)에 있었다. 2.4m 길이의 이 창은 머리에 날카로운 못과 낫 및 갈고리를 달고 있어 적을 찌르고, 베고, 끌어내리는 3중 기능을 발휘했다.
스위스 보병은 산악인들로서 유난히 팔 힘이 좋아, 미늘창을 적 기병에게 내리치고 갑옷과 투구를 절단한 다음 힘차게 끌어내렸다. 또한 그들은 최고의 기강과 단결력을 보이며 아무리 이상한 지형에서도 밀집대형을 공고히 유지한 채 잘 싸웠다. 기병에 둘러싸인 상태에서는 서로 등과 등을 맞댄 이른바 '고슴도치' 대형을 유지하고는 미늘창을 사용해 용맹스럽게 싸웠다.


1315년 11월 오스트리아군 지휘관 레오폴트 대공(Duke Leopold)은 스위스 인들의 토루와 목책 보고 뒤로 군대를 물렸다. 레오폴트 1세는 이 방어 시설들을 인식하고, 그의 부대를 이 방어가 가장 약한 지점을 향해 진군시켰다. 그 통로는 모르가르텐으로 가는 길이었다.
오스트리아의 군대는 기사를 선봉에 배치한 채 긴 종대를 이루어 이 통로를 통과했으며 스위스군을 향해 알프스 산맥의 좁고 비탈진 길에서 정찰을 실시하지 않은 채 앞으로 전진만 했다. 그러던 중 전위의 기마병들은 스위스군이 설치해놓은 돌무더기 장애물을 발견하자, 그것을 치우기 위해 말에서 내렸다. 이는 보병이 할 일이었지만, 그들은 맨 후미에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에 별 도리가 없었다. 바로 그 순간 도로 상단 숲속에 매복해 있던 스위스군은 준비한 돌과 통나무를 일제히 굴러내린 다음 보병 밀집대형을 진출시켰다. 기습을 받은 오스트리아군의 선두부대는 사정없이 미늘창에 도륙되었고, 이제 오스트리아 종대는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밀려 서로 엉키고 있었다. 스위스 인들은 언덕 아래를 향해 맹렬한 공격을 시도했다. 영문도 모른 채 후속하여 도착한 부대들도 좁은 공간에서 기동성을 상실한 채 우왕좌왕하다가 미늘창 공격을 당했다. 도망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어떤 기마병은 무시무시한 미늘창에 맞아죽느니 차라리 인접한 호수에 뛰어들어 자살하기도 했다.
그 결과는 오스트리아군 전체의 패닉이었다. 오스트리아 군의 후위는 습지대로 밀렸고, 그대로 분리되었다. 2,000명에 달하는, 대부분 기사들이었던 오스트리아 전위는 격멸되었다. 스위스 군의 피해는 경미했다.


수적으로 우세한 기병이 적절히 무장되고 잘 훈련된 보병에게 완패한 이 전투 후에도 유럽인들은 기병의 쇠퇴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패배의 원인을 불리한 지형과 무능한 지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스위스 보병은 1339년 라우펜(Laupen)의 보다 활짝 트인 전장에서도 봉건영주들의 기병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보병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100명의 기병은 1,000명의 보병보다 값지다'는 중세의 유행어는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스위스 보병은 전투에서 돌파할 수 없는, 억센 털을 세운 고슴도치와 같은 막강한 방어력을 과시했을 뿐만 아니라, 민첩한 기동성을 갖고서 공격을 할 때도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들은 전투대형으로 집단행군을 하고, 군악에 보조를 맞추어 행군한 최초의 현대식 군대였다.


스위스 보병은 약 150년 정도 서유럽의 다른 나라로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특별히 위대한 지휘관이 없는데도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전술체계로 매번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민주화된 국가의 자유인으로서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전투에 참여했고 그런 그들은 기사의 돌격 앞에서 스스로 대오를 유지할 만한 긍지와 자부심이 있었던 것이다.
이후 장창을 소지하고 전투 의지를 가진 자유민들이 이룬 밀집 대형은 유럽 전역에서 기사의 돌격을 막을 수 있었다.
스위스 장창병은 연방에 소속된 각 주들의 병력으로 분산운용되었는데, 이것이 전술조직화할 수 있는 여지가 되었다.
행군대형과 전투 대형변화가 용이했고, 기동력은 월등히 신장되었다.
기동력 신장에는 두가지 요소가 기여했다.
첫째는 거대한 횡대대형이 아닌 각개 전술조직을 운용함으로서 선형대형을 유지함으로 야기되는 기동성의 상실을 회피하였고,
둘째는 군악을 행군에 적용하여 병력운용이 용이해짐으로서 기동성이 향상되었다.


이 전술조직은 일반적인 모루로서의 장창병 운용이 아닌 공세적 운용이 가능하게 하였는데, 그 결과 당시의 중장기병과 장갑보병에게 둘러싸이는 경우도 잦게 일어났다.
둘러싸여 공격당하면 스위스인들은 고슴도치와 같은 사방에 대응하는 대형으로 저항하였는데, 이것은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측후방을 위협받는 장창밀집대형은 그대로 붕괴하곤 했는데, 이는 측후방에 대한 심리적 위협에 의거한 것이었다.
단위전술조직으로 운용하면 필연적으로 측후방에 대한 위협이 가중되는었데 이 심리적 압박에 아랑곳하지 않았다는 것은 스위스인들의 전투의지가 매우 강인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민주주의의 강인한 전투의지가 승리요인이라고 주장하는 그리스 밀집방진이 측후방 공세에 그냥 무너져 버렸던 반면에, 스위스인들은 달랐다.
스위스 용병들의 가공할 만한 위력의 거대한 장창방진과, 포로를 잡아두는 것을 거부하는 특성과, 승리로 점철된 전과(戰果)는 타인에게 공포와 경의를 갖게 했다.
마키아벨리는 그의 저서 “군주론”에서 그들의 전쟁수행 방식에 대하여 장문으로 언급했다. 프랑스 발루아 가의 왕들은 스위스인들이 없으면 제대로 군대를 꾸리지 못했을 정도다.
스위스의 젊은이들은 낙후된 고향에서 바랄 수 없는 경제적 수익과, 모험과, 유능한 군인으로서의 스위스인의 자부심과, 오랜 전쟁을 거치면서 형성된 ‘전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외지로 나가 싸우고, 더러는 죽곤 했다.
1490년대까지 스위스 용병들은 용병시장을 사실상 독점했다.
그러나 이후 스위스 용병들을 모방한 용병부대가 속속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활약을 보여준 것이 바로 '란츠크네히츠'(Landsknechts)였다.
그들은 독일 출신이었으며, 스위스인들의 전술에 대해 속속들이 잘 파악하고 있었다.
스위스 용병과 란츠크네히츠는 대(大)이탈리아 전쟁(Great Italian Wars, 1494~1559)에서 비로소 자웅을 가리게 된다.
스위스인들은 노바라 전투(Battle of Novara, 1513)에서 밀라노 공국의 편에 서서 프랑스에 고용된 란츠크네히츠를 철저하게 격파했다.
그러나 이후 마리냐노 전투(Battle of Marignano, 1515),
프랑스 편에서 싸운 비코카 전투(Battle of Bicocca, 1522), 파비아 전투(Battle of Pavia, 1525) 등에서 패배하면서 용병세계에서의 일인자 자리를 내놓게 된다.


결국 처절한 패배를 당하지 않고 과학기술 진보에 따르는 심각한 도전을 받아보지 않은 사실이 스위스 인들에게는 오히려 방심의 요인이 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전법 발전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전술적 승리를 전략적인 것으로 연결하지 못해 주도적인 정치세력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그 대신 스위스 보병들은 유럽 여러 곳에서 용병으로 활약했다. 그것도 유럽 군대가 전반적으로 보다 효율적인 군사제도와 유능한 지휘관을 겸비하고 화약무기를 사용하기 시작함으로써 자연히 스위스군의 전술체계는 인기를 잃었다.
비록 최강의 자리를 내주기는 했으나, 그들은 여전히 유럽에서 사랑받고, 또 그들의 명예를 중히 여기는 용병들이었다.
1792년 8월 10일,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루이 16세의 왕궁으로 폭도들이 난입했을 때, 죽어가면서까지 자리를 지킨 위병들은 다름 아닌 스위스인들이었다.
오늘날에도 바티칸 시국에서는 근위병으로 스위스인들을 고용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모르가르텐 전투 - 보병이 기병을 무너뜨리다(1315년)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2010.7.16, 가람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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