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9일 일요일

[BC6세기] 페르시아 제국과 페르시아 군대 V1.0

1. 페르시아 제국
가. 페르시아 제국 개요
 - 고대국가는 전쟁에 의해 세워지고 전쟁으로 패망했다. 일찍이 지중해 동쪽 나일강 우역에서 터를 잡고 출현한 구가 이즙트는 주위의 모든 나라 위에 군림했던 고대의 최강국이었다.
 - 이집트는 인접한 약소국들을 하나하나 점령하고 동으로 진출하여 유프라테스강 유역까지 세력을 뻗쳐나갔다.
 - 이집트는 아시리아 인들로 부터 도전을 받고 그들과의 전쟁에서 패망햇다. 아시라아도 이집과 같은 전철을 밟으며 영토를 최대로 넓혀 나갔다.
 - 그들은 이집트를 정복하고 동으로는 소아시아 및 카프카스 산맥 지역까지 판도를 넓히고 대제국을 건설했다.
 - 그러나 똑같은 방식으로 아시리아는 새로운 강자 바빌로니아(오늘날 이라크) 에게 망했고, 바빌로니아는 다시 페르시아(오늘날 이란) 에게 몰락했다.
 - 기원전 6세기 무렵 페르시아 왕 키로스 Cyros(BC600경 ~ 5300)는 위대한 세계정복자로서, 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동쪽으로 방행을 돌려 인도의 인더스 강 까지 진출했다.
 - 그와 그의 아들이 영토를 확장시키는 동안 페르시아 제국은 고대 아시아 세계에서 가장 넓은 여토를 가진 나라가 되었으며, 다리우스 1세(BC521~486) 당시는 서쪽의 지중해 지역으로 부터 동쪽의 인더스 강 유역까지 모두 22개 속주를 지배했다.


<다리우스 1세>



 - 페르시아 왕은 대제국을 통치함에 있어서 먼저 정복지역의 군주들을 친절하게 대우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실권을 주지는 않았다.
 - 그대신 총독을 두고 행정과 정치를 관장하도록 했다.
 - 아시리아가 철권정책으로 정복지역을 다스린 데 비해, 페르시아는 관용정책을 펴서 페르시아 지배에 대한 지지를 받아내려 했다.
 - 그렇다고 지배당한 민족들이 지배하는 페르시아 인들을 환영하고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일시적으로 크게 저항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 페르시아가 대외적으로 대제국을 지키고 대내적 반란을 효과적으로 방지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강력한 군대 덕분이었다.
 - 페르시아 군은 막강한 군사력을 유지했다. 규모 면에서 나폴레옹의 군대와 버금갔고, 조직 및 전술 차원에서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 페르시아는 정복지역의 사람들로 군대를 충원 시켰다. 그렇게 하여 본국 부대를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시리아의 과오로 부터 배운 것이다.



2. 페르시아 군대 체계
 - 페르시아는 이집트와 몇몇 주요 지역에 상비군을 운용하고, 유사시는 각 지방에서 징집하여 제국군대를 30만 명까지 확도했다.
 - 군 조직은 10진법 편제로 각 10명, 100명, 1000명, 10000명 단위의 부대와 부대장으로 편성했다
 - 부대장은 페르시아 인들로 구성했다. 항상 최소 10000명 이상을 유지했던 상비군은 모두 페르시아 인들로 구성했다.
 - 페르시아 군은 각 민족별로 다양하게 무장했다. 바빌로니아 인 부대는 철제 헬멧을 착용하고 장창과 곤봉으로 무장했다.
- 박트리아 인들은 활과 도끼를 , 파플라고니아 인들은 투창을 사용했다. 사르가트 유목민들은 주로 기병들로서 올가미 밧줄을 사용했다.
 - 순수 페르시안들로 변셩된 부대의 경우, 보병은 가끔 단검과 단창을 휴대하기도 했으나 주무기는 활이었다.
 -방패와 갑옷은 각각 나뭇가지와 천으로 만든것을 사용함으로써 가볍게 했다.
 - 페르시아 군에 있어서 주축을 이룬것은 기병대였고, 그들은 활과 투장으로 무장했다. 페르시아 군은 활을 잘 사용하기로 유명했고, 활의 최대 유효사거리는 162m 정도 되었다.



3.페르시아 전술 전략
 - 페르시아 전술은 일반적으로 기병공역을 펼친 다음 보병이 활로 집중사격하는 것을 특징으로 했다. 비록 전쟁에서 보병과 기병을 협동하여 사용하기는 했지만 페르시아 군의 가장 큰 약점은 인종적,지역적으로 서로 다른 병력을 징집하여 통합 군대를 이루지 못한 점이라 할 수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군은 기병전술을 마스터한 세계 최초 군대였다.
 - 키로스는 본래 기병을 사용할 줄 몰랐다. 그러나 그는 리디아의 크로에소스 왕과의 전쟁에서 낙타부대를 사용하여 적 기병대를 격파한 바 있었다.
 - 그때 그는 기병의 잠재적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 후 기병을 핵심으로 이용하면서 페르시아 군 전술을 발전시켰다.
 - 키로스가 낙타부대를 동원하여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둔 것은 말들이 낙타를 무서워하여 가능했으나, 대규모의 전쟁이나 정복전쟁에서 낙타부대의 이용에는 한계가 있었다.
- 페르시아 군은 기본공격대형을 취할 때 가운데 보병을 배치하고 좌우 양쪽에 기병을 배치했다. 그리고 기병으로 하여금 적군의 측면과 후면을 공격하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이 방법은 그후 오랫동안 기병전술의 표준이 되었다.
- 페르시아 군은 최소 2만 명 이상의 기병을 갖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페르시아 이후 기병은 전쟁에서 오랫동안 광범하게 사용되었다.
 - 인간과 비교활때 말은 크고 빠르며 상대를 놀라게 하는 짐승이다. 말을 탄 기병이 공격해올때 보병이 도망가지 않고 버티는데는 엄청난 요기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무서움을 타고 쉽게 무너지는 보병전열에 대해 기병은 매우 성공적인 공격을 할 수 있었다.
 - 기병공격은 또한 도주하는 적을 추격할때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많은 인평피해를 입혔다.
 - 반면에 말들은 상대가 당당히 버티고 있을 때, 특히 장을 휴대하고 있는 전열에 대해서는 쉽게 공격하지 못하고 접근하기 전에 먼저 피했다. 이것은 동물들의 본능이다.
 - 기병공격을 할때 지휘관이 내려야 할 가장 어려운 결정 중의 하나는 적절한 시간을 언제로 잡느냐 하는 것이었다.
 - 너무빨리 공격하면 말들이 놀라고 역습당할 우려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적 보병에 대한 기병공격은 적 전열에 빈틈이 발생할 때로 한정했다.
 - 기병은 주로 정찰활동을 하고, 일단 공격을 개시할 때는 먼저 적 기병을 노렸다. 이때도 측후방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 그리하여 적 기병이 무너지고 동시에 보병이 당황하는 순간에 공격을 개시했다.
 - 페르시아 군은 전장에서 활과 말을 잘 사용했고 고대 서아시아 세계에서 최강의 군대를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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