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1일 토요일

[BC4세기] 필리포스와 마케도니아 군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그리스는 스파르타가 중심적 역할을 했으나 그 체제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 대신 북쪽에서 마케도니아가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더니 이윽고 전 그리스를 통일했다. 그리스는 일찍부터 남쪽 지방의 문화가 북쪽보다 앞섰고, 그래서 북쪽 사람들을 야만인처럼 취급하는 풍조가 있었는데, 어떻게 마케도니아인들이 최초로 그리스를 통일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순전히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BC359~336)의 군사적 업적에 의해 가능한 일이었다. 필리포스는 군사기술의 혁명을 이루고 마케도니아 군대를 고대 서양에서 가장 훌륭한 군대로 만들었다. 그가 이룬 혁명이란 간단히 말하면 서양의 보병과 동양의 기병을 잘 혼합해 통합군을 만든 것이었다.

필리포스 이전에도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배운 동양의 군사기술들을 그들 전법에 적용하기 위해 애썼다. 특히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는 가장 인상적인 기병 외에 경보병 · 척후병 · 용병제도 · 해군 · 활 · 투석기 등과 같은 기술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 실험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들은 제각기 아무리 뛰어나도 서로 다른 기술과 결합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여러 가지를 효과적으로 통합할 수 있는 특별한 기술과 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그리스인들은 그들 정치제도에 부합하는, 그야말로 자랑스러운 중보병에 대해 비록 군사적 약점이 있더라도 그 전통을 쉽게 포기하지 못했다.

필리포스는 테베에 볼모로 지내던 시절 테베의 명장 에파미논다스의 전법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갖고 관찰했다. 그리고는 왕으로 취임하자마자 마케도니아에 가장 효과적인 전술을 정립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는 당시 알려진 여러 가지 기술들 가운데 각각의 장점을 발췌해 상호 결합시킴으로써 최고의 전투기술을 발휘하는 통합군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필리포스는 마케도니아의 정치제도가 다른 도시국가에 비해 안정되지 않은 점을 오히려 역이용해 여러 가지 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했다. 그는 영토팽창 정책과 금광 획득에 의한 수입으로 재정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들 위주로 나라를 이끌면서 신분제도를 유지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마케도니아의 정치제도에 부합되는 군사제도를 연구하여 당대에 가장 강력한 군대를 조직했던 것이다.

필리포스의 군대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기병이었다. 기병은 귀족출신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말을 잘 탔기 때문에 승마술에 대해서는 따로 훈련받을 필요가 없었으며, 단지 무거운 갑옷을 입고 무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기술만 익히면 훌륭한 기병이 되었다. 그들은 전투할 때는 휴대한 장창(Sarissa)을 앞으로 내밀어 적진에 충돌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는 장검을 사용하고 장창을 던지기도 했다.

필리포스는 15개 대대로 구성된 기병대를 보유했다. 그 규모는 1개 기병대대 200명으로서 총 3,000명이었다. 이러한 중기병 외에도 필리포스는 따로 약간의 경기병을 두고 그들을 주로 정찰 및 척후병 활동에 이용했다.

필리포스의 군대에서 기병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해 보병이 전혀 별 볼일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필리포스가 이룩한 전술개혁 가운데 위대한 면은 오히려 보병의 조직 및 무장에서 찾을 수 있다.



마케도니아 보병은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그리스 보병과 마찬가지로 중보병이었다. 그러나 4.2m나 되는 장창을 휴대한 것이 큰 차이점인데, 종래의 것보다 무려 1.8m나 긴 장창은 적과의 창 대결에서 단연코 유리한 이점을 제공했다. 전투를 벌일 때 전열에서부터 제5열까지 창을 앞으로 내밀면 제5열 병사의 창끝이 제1열 전방까지 나옴으로써 충격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었다. 또한 창을 세우고 행군할 때 마케도니아 보병대는 마치 숲을 움직이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임으로써 전투전에 적을 심리적으로 제압했다.

마케도니아 중보병대는 깊이가 16열이나 되는 밀집대형을 유지하고 개개 병사 간격을 그리스 시대보다 약간 넓게 유지했다. 장창을 사용하는 데 보다 어려운 기량이 요구되거나 때로는 두 손을 다 필요로 하는 경우도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중보병대는 6개 대대로 편성되고 각 대대는 16열 16오 256명으로 구성된 6개 중대로 편성되었다. 각 단위대 별 훈련은 중대장과 대대장 통제 하에 실시되었다.

필리포스는 중보병대가 어느 방향에서든 맞부딪치는 적들과 잘 싸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적절한 대형 변경 훈련을 반복했다. 그리하여 중보병대는 상황에 따라 종심을 늘였다 줄였다 하고 개인 간격도 조정하며 신축성 있게 움직였다. 후계자인 알렉산드로스 대왕 때는 보다 신속한 대형 변경을 취할 수 있게 됨으로써 과거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포위전이나 산악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필리포스는 중보병 외에 경보병과 척후병을 잘 활용했다. 척후병은 주로 궁수나 돌팔매 병사로서, 전투할 때는 맨 앞에 위치해 일종의 장거리 화력을 퍼부으며 적을 혼란시키다가 적이 육박해오면 전장에서 물러섰다. 한편 경보병은 기본 전투대형의 측후방에 위치해 주로 투창을 사용하며 전투에 참여했다. 그들은 공격 시에는 기병 뒤를 따라가 적군 대열의 혼란한 틈에 활약하고, 방어 시에는 적 기병에 맞서거나 지형이 험한 곳에서 적 중보병에 대항했다.

필리포스의 업적에 대해 말할 때는 이상과 같은 여러 전투요소의 통합을 이룬 사실뿐만 아니라 그와 더불어 공격전술의 기본개념인 이른바 '망치'와 '모루'의 개념을 처음으로 확립한 점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그는 에파미논다스의 사선진1) 전법으로부터 주공과 조공 개념을 도입해 병력을 나누어 운용하는 방법을 배웠는데, 기병을 주공부대로 보병을 조공부대로 운용했다. 즉 기병으로 하여금 '망치(타격부대)' 역할을 하면서 적을 타격하도록 하고, 그러한 기병공격을 돕기 위해 보병에게는 '모루(저지부대)' 역할을 맡겨 적을 붙잡아 놓도록 했다. 이후 주공과 조공의 구분 및 '망치'와 '모루' 전법은 모든 전략가들이나 군사이론가들에게 기본상식이 되었다.

- 사선진: 병력을 우익 또는 좌익에 집중배치한 전투대형. 기원전 371년 레우크트라 전투에서 테베 군이 최초로 사용




'망치와 모루' 원리의 전법

필리포스는 전술대형의 발전, 무기 개량, 여러 병종 간 협동, '망치'와 '모루'의 개념 확립 등 업적을 남겼으며, 정보 및 역정보 이용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는 상인들과 여행자, 그밖에 특수 스파이 등 정보조직을 이용해 적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파악했다. 이런 행동은 과거의 그리스인들이 속임수, 스파이 등에 대해 명예롭지 못하다고 하여 공평한 조건에서 공개적으로 전투를 벌이려 했던 것과는 크게 대조를 이룬다.

필리포스는 사전 정보 없이는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않았다. 행군할 때도 기병 정찰병을 먼저 내보내 적정을 살핀 다음에야 전술적 조치를 취했다. 또한 적을 기만하기 위해 수시로 역정보 작전을 폈다. 예를 들면 가짜 진군명령을 내리고 실제로는 부대를 다른 방향으로 진군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부대에 관한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주요 군사회의에 참가자를 극소수로 제한하고, 부대 주위에는 언제나 기병을 배치해 출입자를 철저히 통제했다.

필리포스의 통합군에 의한 새로운 전법은 당시 그리스인들에게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마케도니아 군대가 진군해오고 있다는 소식만 듣고도 다른 도시국가 사람들은 지레 겁을 먹었다. 구식 전법에 젖은 순박한 시민병들은 중기병만이 아닌 기병 · 경보병 · 궁병 등의 공격에도 당황했다. 그들은 평지 아닌 산악에서 여러 날 전투를 치르는 것을 꺼렸으며, 정면대결 아닌 측후방 공격과 기만 및 역정보가 판치는 전장에서는 예전처럼 목숨을 바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무릇 전쟁이란 새로운 전법에 잘 순응하는 사람들에게 승리를 안겨주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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