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6일 일요일

[BC7세기] 그리스 중보병과 방진

1. 그리스 중보병 과 방진
 - 아시리아 군대나 페르시가 군대가 정교한 전법을 사용하고 지중해 동쪽 지역을 주름잡던 시절, 에게해 서쪽 그리스 인들의 전쟁방법은 상대적으로 형편없었다. 다른 아이디어가 그랬듯이  고대의 전술도 이집트.아시리아.페르시아에서 그리스 지역으로 전래된 것이 많다. 그런데 기원전 7세기경 그리스는 근동지역에서는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전법을 개발했다.


 - 그리스 군은 중장 보병들로 구성된 밀집대형에 의존해 싸웠다. 이들 보병들은 갑옷, 투구, 청동제 정강이 받이 등을 착용하고 방패를 들었으며, 주무기로 2.1 ~2.4m 길이의 창을 지녔다. 그리하여 각 병사는 34kg 달하는 장비와 무기를 들고 싸워야 했다. 이에 연유하여 그리스 병사를 '호플라이트 hoplite' 라고 불렀다.


 - 방패는 직경 90cm 의 원형 목재에 청동판을 가장자리에 씌워 만들고, 방패 안쪽 가운데와 가장자리에 두개의 손잡이를 부착했다. 이 방패를 사용할때 보병은 왼쪽 팔꿈치까지를 가운데 손잡이 끈에 끼우고 가장자리 끈을 손으로 움켜잡은 채 앞몸을 보호하면서 싸웠다.


 - 이러한 중(重)보병의 등장은 당시 정치적 · 군사적 환경변화에 기인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시대의 전쟁은 주로 아킬레우스와 같은 신 또는 영웅들의 싸움으로서, 전차(전투용 마차)를 타고 달려가 결투를 벌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즉, 귀족신분의 전사들만이 참가하고, 승패는 그들의 개인적 기량에 따라 결정되었다. 말과 마차가 비싸기 때문에도 일반인들은 전투에 참여할 수 없었다.


- 기원전 8세기경 그리스는 인구가 증가하고 농업기술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땅을 균등히 나누어 소유하는 등 가족 위주의 자작농 사회로 바뀌었다. 즉, 집단생활로부터 가족단위의 농업사회로 바뀐 것이다. 그들은 한 사람의 우두머리에게 의존하던 생활보다는 '위로부터의' 간섭 없이 가족 단위의 서로 대등한 입장에서 농사짓는 생활을 통해 생산성을 증대시키며 부유하게 살게 되었다.


-이런 생활로 정착하는 동안 그리스인들은 가족들을 서로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대표들을 선출하고, 대표들로 자치회를 구성하여 운영하는 방식의 도시국가를 형성했다. 그리스 내에 작은 도시국가는 1천 개가 넘게 형성되고, 인접한 작은 도시국가들이 모여 큰 도시국가를 형성했다. 그리고 도시국가 간에는 주로 땅에 대한 소유권을 둘러싸고 경계지역에서 분쟁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투표권을 행사하는 시민들은 자기 도시국가를 스스로 지키기 위해 모두 싸움터로 나가 싸웠으며, 그러지 못하면 참정권을 잃었다. 말하자면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독특한 정치제도에서 민주주의 원리를 적용했듯이, 군사제도에 있어서도 다수가 대등하게 참여하는 민주주의적 방법을 채택하여 시민군대를 이룬 것이다.


- 병종은 누구나 쉽게 참여하고 특별한 기술 없이도 집단을 이루어 싸울 수 있는 보병으로만 구성했다. 호플라이트는 자신의 창과 방패를 스스로 준비해야 했다. 그래서 초기에는 각양각색이었으나 나중에는 제조업자들에게 주문생산을 통해 구입하여 어느 정도 통일을 기할 수 있었다.


2. 그리스 중보병 전술 전략
- 호플라이트 개개인은 이전의 귀족전사와 비교할 때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그야말로 형식적인 병사에 불과했으며, 따로 고립되어 있을 때는 적에게 좋은 표적이 될 뿐이었다. 그러나 밀집대형을 이루어 싸울 때는 무서운 힘을 발휘했고, 종래의 전사들의 공격이나 또는 페르시아 군대처럼 기병 위주로 편성된 막강한 군대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그리스인들이 밀집대형을 이루어 싸우게 된 데는 농업방식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다고 고대 그리스 역사가 크세노폰은 설명했다.


- "농업은 사람들에게 서로 돕는 방법을 가르쳤다. 또한 적과 싸울 때도 땅에서 일할 때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 그리스인들의 전투는 기본적으로 농부들의 전투로서, 농지를 놓고 농지 위에서 밀집대형을 이루어 싸우고, 구릉이나 산악지형에서는 싸우지 않았다. 일반적으로는 수확철이 지난 다음 서로 약속한 장소에 집결하여 한나절 싸우는 식으로 전투가 이루어졌다. 대개 전투시간은 대단히 짧았고, 한 번의 충돌로 결판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 열(列)과 오(伍)로 배치된 보병들의 밀집대형은 사각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방진(phalanx)'이라고 불렀다. 통상 8열 횡대대형을 유지한 방진은 전투를 벌일 때 열과 오로 단단히 뭉쳐 충격력을 이용하여 상대편 방진과 정면충돌함으로써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 적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최전열을 견고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제3열까지는 창끝을 앞으로 내밀고 창찌르기 경합을 벌여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쓰러지는 병사가 나타나면 뒷열에 있는 병사가 자리를 메웠다. 뒷열들로부터 압력을 받는 가운데 두 방진은 팽팽히 맞서지만 어떤 단계가 지나면 힘이 약한 쪽의 전열이 흩어지며, 그리하여 공포에 빠진 병사들이 대열을 이탈하여 도망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승부는 끝이 났다.


 - 병사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병사는 오른쪽에 배치되었다. 그리하여 상대의 약한 왼쪽을 공격하게 되니 방진의 전진방향은 자연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시계 반대방향으로 선회하는 경향을 보였다. 방진 간에 육박전을 벌인 전투에서 열과 오를 유지하는 일이란 극히 어려운 일이지만, 그리스 병사들은 용기가 있었고 또한 전장에서 공포심을 극복할 수 있도록 훈련 및 군기를 강조했다.




 -그리스인들은 전장에 나가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전장에서 죽는 것에 대해서는 자랑스런 삶의 마감으로 여겼다.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하며, 그렇지 못하고 방패를 내던지고 도망가는 일은 가장 비굴하다고 인식했다. 그것은 비겁할 뿐 아니라 다른 전우들을 위태롭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그리스의 한 도시국가였던 스파르타에서 어머니들은 아들들을 전장에 내보낼 때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 "집으로 돌아올 때는 방패를 들고 오고, 그렇지 못하면 방패 위에 누워서 오너라."
 
- 스파르타는 완전히 병영국가로서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던 도시국가였다. 스파르타의 모든 성인남자들은 30세에 이르기까지 정기적으로 군대막사에서 생활하고 고도의 군사적인 기예를 닦았다. 그리스의 다른 도시국가 군대도 스파르타군보다는 덜 엄격하고 훈련이 약했으나, 자국을 방어하는 희생정신에서는 결코 스파르타군에 못지않았다.





2014년 1월 19일 일요일

[1315년]모르가르텐 전투

13세기 말까지 유럽인들 가운데서 십자군 원정의 값진 군사적 교훈, 즉 승리를 위해서는 보병과 기병의 긴밀한 공조체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제대로 깨달은 이는 드물었다. 유럽 내에서 여전히 중기병이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4세기에 들어서자 약 1,000년간 맹위를 떨친 기병의 몰락을 의미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창병 또는 궁수들로 구성된 보병이 기병과의 싸움에서 이기는가 하면, 대포 지원을 받은 보병이 기병을 무찌름으로써 전술상 대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유럽의 중기병이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첫 번째 사건은 1315년 모르가르텐(Morgarten) 전투에서 일어났다.
모르가르텐 전투(독일어: Schlacht am Morgarten)는 1315년 스위스 동맹군오스트리아를 무찌른 전투로 이 전투의 승리로 스위스가 독립을 했다.
1314년초 스위스 연방의 일원이었던 슈비츠 사람들이 이웃 아인지델른 대수도원을 약탈하자 이 지역의 지배권을 주장하던 오스트리아 공작인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 레오폴트 1세는 기사들을 모아 군대를 일으켰다.


1273년 스위스우리, 옵발덴, 슈비츠, 니드발덴 등 4개 주는 스위스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싸움을 준비했다. 이에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 왕 레오폴트 1세가 군대를 이끌고 스위스를 침공했다. 스트라스부르크의 오토 경이 좌측을 공격하고 뒤이어 루체른 성주가 호수를 넘어 스위스를 공격했으며, 레오폴드 1세의 대군이 주력 부대를 이끌고 스위스를 공격했다.
기병 위주로 편성된 오스트리아 원정군은 농민으로 이루어진 스위스의 창병들에게 마치 푸줏간의 고기처럼 도륙 당했다. 스위스군 2,000명과 오스트리아군 5,000명간의 소규모 충돌이었으나, 이 전투는 보병이 기병을 무너뜨린, 전쟁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스위스의 창보병들
스위스 보병은 과거로 돌아가 마케도니아 방진과 같은 대형을 유지하면서 싸운, 당시 유럽에서는 유별난 군대였다. 그러나 그러한 고전적 대형만으로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특수성은 오히려 그들이 사용한 주무기였던 미늘창(halberd)에 있었다. 2.4m 길이의 이 창은 머리에 날카로운 못과 낫 및 갈고리를 달고 있어 적을 찌르고, 베고, 끌어내리는 3중 기능을 발휘했다.
스위스 보병은 산악인들로서 유난히 팔 힘이 좋아, 미늘창을 적 기병에게 내리치고 갑옷과 투구를 절단한 다음 힘차게 끌어내렸다. 또한 그들은 최고의 기강과 단결력을 보이며 아무리 이상한 지형에서도 밀집대형을 공고히 유지한 채 잘 싸웠다. 기병에 둘러싸인 상태에서는 서로 등과 등을 맞댄 이른바 '고슴도치' 대형을 유지하고는 미늘창을 사용해 용맹스럽게 싸웠다.


1315년 11월 오스트리아군 지휘관 레오폴트 대공(Duke Leopold)은 스위스 인들의 토루와 목책 보고 뒤로 군대를 물렸다. 레오폴트 1세는 이 방어 시설들을 인식하고, 그의 부대를 이 방어가 가장 약한 지점을 향해 진군시켰다. 그 통로는 모르가르텐으로 가는 길이었다.
오스트리아의 군대는 기사를 선봉에 배치한 채 긴 종대를 이루어 이 통로를 통과했으며 스위스군을 향해 알프스 산맥의 좁고 비탈진 길에서 정찰을 실시하지 않은 채 앞으로 전진만 했다. 그러던 중 전위의 기마병들은 스위스군이 설치해놓은 돌무더기 장애물을 발견하자, 그것을 치우기 위해 말에서 내렸다. 이는 보병이 할 일이었지만, 그들은 맨 후미에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에 별 도리가 없었다. 바로 그 순간 도로 상단 숲속에 매복해 있던 스위스군은 준비한 돌과 통나무를 일제히 굴러내린 다음 보병 밀집대형을 진출시켰다. 기습을 받은 오스트리아군의 선두부대는 사정없이 미늘창에 도륙되었고, 이제 오스트리아 종대는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밀려 서로 엉키고 있었다. 스위스 인들은 언덕 아래를 향해 맹렬한 공격을 시도했다. 영문도 모른 채 후속하여 도착한 부대들도 좁은 공간에서 기동성을 상실한 채 우왕좌왕하다가 미늘창 공격을 당했다. 도망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어떤 기마병은 무시무시한 미늘창에 맞아죽느니 차라리 인접한 호수에 뛰어들어 자살하기도 했다.
그 결과는 오스트리아군 전체의 패닉이었다. 오스트리아 군의 후위는 습지대로 밀렸고, 그대로 분리되었다. 2,000명에 달하는, 대부분 기사들이었던 오스트리아 전위는 격멸되었다. 스위스 군의 피해는 경미했다.


수적으로 우세한 기병이 적절히 무장되고 잘 훈련된 보병에게 완패한 이 전투 후에도 유럽인들은 기병의 쇠퇴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패배의 원인을 불리한 지형과 무능한 지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스위스 보병은 1339년 라우펜(Laupen)의 보다 활짝 트인 전장에서도 봉건영주들의 기병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보병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100명의 기병은 1,000명의 보병보다 값지다'는 중세의 유행어는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스위스 보병은 전투에서 돌파할 수 없는, 억센 털을 세운 고슴도치와 같은 막강한 방어력을 과시했을 뿐만 아니라, 민첩한 기동성을 갖고서 공격을 할 때도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들은 전투대형으로 집단행군을 하고, 군악에 보조를 맞추어 행군한 최초의 현대식 군대였다.


스위스 보병은 약 150년 정도 서유럽의 다른 나라로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특별히 위대한 지휘관이 없는데도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전술체계로 매번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민주화된 국가의 자유인으로서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전투에 참여했고 그런 그들은 기사의 돌격 앞에서 스스로 대오를 유지할 만한 긍지와 자부심이 있었던 것이다.
이후 장창을 소지하고 전투 의지를 가진 자유민들이 이룬 밀집 대형은 유럽 전역에서 기사의 돌격을 막을 수 있었다.
스위스 장창병은 연방에 소속된 각 주들의 병력으로 분산운용되었는데, 이것이 전술조직화할 수 있는 여지가 되었다.
행군대형과 전투 대형변화가 용이했고, 기동력은 월등히 신장되었다.
기동력 신장에는 두가지 요소가 기여했다.
첫째는 거대한 횡대대형이 아닌 각개 전술조직을 운용함으로서 선형대형을 유지함으로 야기되는 기동성의 상실을 회피하였고,
둘째는 군악을 행군에 적용하여 병력운용이 용이해짐으로서 기동성이 향상되었다.


이 전술조직은 일반적인 모루로서의 장창병 운용이 아닌 공세적 운용이 가능하게 하였는데, 그 결과 당시의 중장기병과 장갑보병에게 둘러싸이는 경우도 잦게 일어났다.
둘러싸여 공격당하면 스위스인들은 고슴도치와 같은 사방에 대응하는 대형으로 저항하였는데, 이것은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측후방을 위협받는 장창밀집대형은 그대로 붕괴하곤 했는데, 이는 측후방에 대한 심리적 위협에 의거한 것이었다.
단위전술조직으로 운용하면 필연적으로 측후방에 대한 위협이 가중되는었데 이 심리적 압박에 아랑곳하지 않았다는 것은 스위스인들의 전투의지가 매우 강인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민주주의의 강인한 전투의지가 승리요인이라고 주장하는 그리스 밀집방진이 측후방 공세에 그냥 무너져 버렸던 반면에, 스위스인들은 달랐다.
스위스 용병들의 가공할 만한 위력의 거대한 장창방진과, 포로를 잡아두는 것을 거부하는 특성과, 승리로 점철된 전과(戰果)는 타인에게 공포와 경의를 갖게 했다.
마키아벨리는 그의 저서 “군주론”에서 그들의 전쟁수행 방식에 대하여 장문으로 언급했다. 프랑스 발루아 가의 왕들은 스위스인들이 없으면 제대로 군대를 꾸리지 못했을 정도다.
스위스의 젊은이들은 낙후된 고향에서 바랄 수 없는 경제적 수익과, 모험과, 유능한 군인으로서의 스위스인의 자부심과, 오랜 전쟁을 거치면서 형성된 ‘전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외지로 나가 싸우고, 더러는 죽곤 했다.
1490년대까지 스위스 용병들은 용병시장을 사실상 독점했다.
그러나 이후 스위스 용병들을 모방한 용병부대가 속속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활약을 보여준 것이 바로 '란츠크네히츠'(Landsknechts)였다.
그들은 독일 출신이었으며, 스위스인들의 전술에 대해 속속들이 잘 파악하고 있었다.
스위스 용병과 란츠크네히츠는 대(大)이탈리아 전쟁(Great Italian Wars, 1494~1559)에서 비로소 자웅을 가리게 된다.
스위스인들은 노바라 전투(Battle of Novara, 1513)에서 밀라노 공국의 편에 서서 프랑스에 고용된 란츠크네히츠를 철저하게 격파했다.
그러나 이후 마리냐노 전투(Battle of Marignano, 1515),
프랑스 편에서 싸운 비코카 전투(Battle of Bicocca, 1522), 파비아 전투(Battle of Pavia, 1525) 등에서 패배하면서 용병세계에서의 일인자 자리를 내놓게 된다.


결국 처절한 패배를 당하지 않고 과학기술 진보에 따르는 심각한 도전을 받아보지 않은 사실이 스위스 인들에게는 오히려 방심의 요인이 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전법 발전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전술적 승리를 전략적인 것으로 연결하지 못해 주도적인 정치세력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그 대신 스위스 보병들은 유럽 여러 곳에서 용병으로 활약했다. 그것도 유럽 군대가 전반적으로 보다 효율적인 군사제도와 유능한 지휘관을 겸비하고 화약무기를 사용하기 시작함으로써 자연히 스위스군의 전술체계는 인기를 잃었다.
비록 최강의 자리를 내주기는 했으나, 그들은 여전히 유럽에서 사랑받고, 또 그들의 명예를 중히 여기는 용병들이었다.
1792년 8월 10일,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루이 16세의 왕궁으로 폭도들이 난입했을 때, 죽어가면서까지 자리를 지킨 위병들은 다름 아닌 스위스인들이었다.
오늘날에도 바티칸 시국에서는 근위병으로 스위스인들을 고용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모르가르텐 전투 - 보병이 기병을 무너뜨리다(1315년)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2010.7.16, 가람기획)


[BC6세기] 페르시아 제국과 페르시아 군대 V1.0

1. 페르시아 제국
가. 페르시아 제국 개요
 - 고대국가는 전쟁에 의해 세워지고 전쟁으로 패망했다. 일찍이 지중해 동쪽 나일강 우역에서 터를 잡고 출현한 구가 이즙트는 주위의 모든 나라 위에 군림했던 고대의 최강국이었다.
 - 이집트는 인접한 약소국들을 하나하나 점령하고 동으로 진출하여 유프라테스강 유역까지 세력을 뻗쳐나갔다.
 - 이집트는 아시리아 인들로 부터 도전을 받고 그들과의 전쟁에서 패망햇다. 아시라아도 이집과 같은 전철을 밟으며 영토를 최대로 넓혀 나갔다.
 - 그들은 이집트를 정복하고 동으로는 소아시아 및 카프카스 산맥 지역까지 판도를 넓히고 대제국을 건설했다.
 - 그러나 똑같은 방식으로 아시리아는 새로운 강자 바빌로니아(오늘날 이라크) 에게 망했고, 바빌로니아는 다시 페르시아(오늘날 이란) 에게 몰락했다.
 - 기원전 6세기 무렵 페르시아 왕 키로스 Cyros(BC600경 ~ 5300)는 위대한 세계정복자로서, 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동쪽으로 방행을 돌려 인도의 인더스 강 까지 진출했다.
 - 그와 그의 아들이 영토를 확장시키는 동안 페르시아 제국은 고대 아시아 세계에서 가장 넓은 여토를 가진 나라가 되었으며, 다리우스 1세(BC521~486) 당시는 서쪽의 지중해 지역으로 부터 동쪽의 인더스 강 유역까지 모두 22개 속주를 지배했다.


<다리우스 1세>



 - 페르시아 왕은 대제국을 통치함에 있어서 먼저 정복지역의 군주들을 친절하게 대우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실권을 주지는 않았다.
 - 그대신 총독을 두고 행정과 정치를 관장하도록 했다.
 - 아시리아가 철권정책으로 정복지역을 다스린 데 비해, 페르시아는 관용정책을 펴서 페르시아 지배에 대한 지지를 받아내려 했다.
 - 그렇다고 지배당한 민족들이 지배하는 페르시아 인들을 환영하고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일시적으로 크게 저항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 페르시아가 대외적으로 대제국을 지키고 대내적 반란을 효과적으로 방지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강력한 군대 덕분이었다.
 - 페르시아 군은 막강한 군사력을 유지했다. 규모 면에서 나폴레옹의 군대와 버금갔고, 조직 및 전술 차원에서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 페르시아는 정복지역의 사람들로 군대를 충원 시켰다. 그렇게 하여 본국 부대를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시리아의 과오로 부터 배운 것이다.



2. 페르시아 군대 체계
 - 페르시아는 이집트와 몇몇 주요 지역에 상비군을 운용하고, 유사시는 각 지방에서 징집하여 제국군대를 30만 명까지 확도했다.
 - 군 조직은 10진법 편제로 각 10명, 100명, 1000명, 10000명 단위의 부대와 부대장으로 편성했다
 - 부대장은 페르시아 인들로 구성했다. 항상 최소 10000명 이상을 유지했던 상비군은 모두 페르시아 인들로 구성했다.
 - 페르시아 군은 각 민족별로 다양하게 무장했다. 바빌로니아 인 부대는 철제 헬멧을 착용하고 장창과 곤봉으로 무장했다.
- 박트리아 인들은 활과 도끼를 , 파플라고니아 인들은 투창을 사용했다. 사르가트 유목민들은 주로 기병들로서 올가미 밧줄을 사용했다.
 - 순수 페르시안들로 변셩된 부대의 경우, 보병은 가끔 단검과 단창을 휴대하기도 했으나 주무기는 활이었다.
 -방패와 갑옷은 각각 나뭇가지와 천으로 만든것을 사용함으로써 가볍게 했다.
 - 페르시아 군에 있어서 주축을 이룬것은 기병대였고, 그들은 활과 투장으로 무장했다. 페르시아 군은 활을 잘 사용하기로 유명했고, 활의 최대 유효사거리는 162m 정도 되었다.



3.페르시아 전술 전략
 - 페르시아 전술은 일반적으로 기병공역을 펼친 다음 보병이 활로 집중사격하는 것을 특징으로 했다. 비록 전쟁에서 보병과 기병을 협동하여 사용하기는 했지만 페르시아 군의 가장 큰 약점은 인종적,지역적으로 서로 다른 병력을 징집하여 통합 군대를 이루지 못한 점이라 할 수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군은 기병전술을 마스터한 세계 최초 군대였다.
 - 키로스는 본래 기병을 사용할 줄 몰랐다. 그러나 그는 리디아의 크로에소스 왕과의 전쟁에서 낙타부대를 사용하여 적 기병대를 격파한 바 있었다.
 - 그때 그는 기병의 잠재적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 후 기병을 핵심으로 이용하면서 페르시아 군 전술을 발전시켰다.
 - 키로스가 낙타부대를 동원하여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둔 것은 말들이 낙타를 무서워하여 가능했으나, 대규모의 전쟁이나 정복전쟁에서 낙타부대의 이용에는 한계가 있었다.
- 페르시아 군은 기본공격대형을 취할 때 가운데 보병을 배치하고 좌우 양쪽에 기병을 배치했다. 그리고 기병으로 하여금 적군의 측면과 후면을 공격하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이 방법은 그후 오랫동안 기병전술의 표준이 되었다.
- 페르시아 군은 최소 2만 명 이상의 기병을 갖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페르시아 이후 기병은 전쟁에서 오랫동안 광범하게 사용되었다.
 - 인간과 비교활때 말은 크고 빠르며 상대를 놀라게 하는 짐승이다. 말을 탄 기병이 공격해올때 보병이 도망가지 않고 버티는데는 엄청난 요기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무서움을 타고 쉽게 무너지는 보병전열에 대해 기병은 매우 성공적인 공격을 할 수 있었다.
 - 기병공격은 또한 도주하는 적을 추격할때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많은 인평피해를 입혔다.
 - 반면에 말들은 상대가 당당히 버티고 있을 때, 특히 장을 휴대하고 있는 전열에 대해서는 쉽게 공격하지 못하고 접근하기 전에 먼저 피했다. 이것은 동물들의 본능이다.
 - 기병공격을 할때 지휘관이 내려야 할 가장 어려운 결정 중의 하나는 적절한 시간을 언제로 잡느냐 하는 것이었다.
 - 너무빨리 공격하면 말들이 놀라고 역습당할 우려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적 보병에 대한 기병공격은 적 전열에 빈틈이 발생할 때로 한정했다.
 - 기병은 주로 정찰활동을 하고, 일단 공격을 개시할 때는 먼저 적 기병을 노렸다. 이때도 측후방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 그리하여 적 기병이 무너지고 동시에 보병이 당황하는 순간에 공격을 개시했다.
 - 페르시아 군은 전장에서 활과 말을 잘 사용했고 고대 서아시아 세계에서 최강의 군대를 자랑했다.


2014년 1월 11일 토요일

[BC13세기] 트로이 전쟁

서양세계에서 일찍이 인간의 갈등을 다룬 가장 유명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로 트로이 전쟁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인간의 갈등뿐만 아니라 신들의 불화와 싸움을 함께 뒤섞어 이야기하는 이 전설 속에 과연 역사적 사실성이 어느 정도 담겨 있을까에 대해서 설들이 분분하다.


오랫동안 많은 역사가들은 트로이 전쟁에 대해 그것을 기원전 850~800년경 호메로스가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서 당시 내려오던 전설과 그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정리한 문학작품 속의 한 사건으로 간주해왔다.


그러나 근래에 고고학자들은 오늘날 터키 서쪽 다르다넬스 해안에서 9층으로 쌓인 트로이 유적지를 발견하고, 그 가운데 여섯 번째 층이 그리스군에게 기원전 약 1200년경에 파괴된 도시의 유적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에게 해와 흑해를 잇는 다르다넬스 해안의 관문을 점령하고 있는 트로이 성은 여러 차례 이민족의 침략을 받는 가운데 파괴되고 재건축되는 과정을 거듭했다. 유적지에서 마지막으로 형성된 층은 로마인들이 점령하여 세운 도시 일리온으로 밝혀졌다.


트로이 성을 공격하기 전 그리스는 수많은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있었다. 트로이 전쟁의 원인에 대해 호메로스는 신과 영웅들의 경쟁 및 불화로 돌리고 있다. 즉, 스파르타의 메넬라오스 왕의 아름다운 아내 헬레네를 트로이의 프리아모스 왕의 아들 파리스가 유혹함으로써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났다면 그 실제 원인은 신들이 작용했다기보다는 다르다넬스 관문을 통과하여 흑해에서 교역을 시도하던 그리스인들이 그곳을 지키며 일종의 통과세를 요구하는 트로이인들과의 사이에서 충돌이 발생하면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여하튼 그리스인들은 2년간 전쟁준비를 마치고 대함대로 군대를 트로이 해안에 상륙시켰다. 약 25,000명으로 추산되는 그리스군은 상륙하자마자 진지를 보호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트로이는 주위를 잘 통제할 수 있는 요새로서 성내에는 왕궁이 있고, 약 3천 명 가량으로 추산되는 수비대가 있었다. 사방에 탑이 있어 접근하는 적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고, 높이 6m, 두께 4.5m의 성벽으로 보호되었다. 이 정도의 성벽만으로도 트로이군은 그리스군의 엉성한 공성작전을 충분히 막아냈다.


그리스군은 각 부족별로 조직을 가졌는데, 그것은 각 부족의 병력과 지휘관의 덕망에 따라 우열의 차가 심했다. 개개 병사들은 대부분 창으로 무장하고 지휘관은 전차(전투용 마차)를 보유했다.


전쟁은 결정적인 승패 없이 9년이나 지속되었다. 그 무렵 그리스군은 두 유명한 지휘관, 즉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 간의 불화로 말미암아 단합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지휘관들 중에서도 가장 용감한 지휘관이었던 아킬레우스가 가만있는 동안 그리스군은 승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에 대한 감정을 풀고 싸움터에 나섰을 때 그리스군은 아킬레우스의 갑옷만 보고도 사기충천했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의 지휘관 헥토르와 싸워 그를 쓰러뜨렸다.


그러나 트로이는 바로 함락되지 않고 새로운 동맹자들의 지원을 받아 저항을 계속했다. 이때 동맹자 가운데는 아마존 여왕 펜테실레이아도 끼어 있었다. 여하튼 트로이가 버티는 한 그리스군은 구태의연한 방법만으로는 트로이를 정복할 수 없음을 깨닫고, 마지막으로 오디세우스의 충고를 받아들여 특별한 방법으로서 목마의 계략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들은 공성을 포기하고 퇴각하는 것처럼 가장, 일부가 인접한 섬 뒤에 숨어서 거대한 목마를 제작했다. 그들은 그것을 불화의 여신 엘리스에게 선물로 제공할 것이라고 선전했으나, 사실은 그 속에 무장한 병사들을 숨겨놓았다. 목마는 20~50명의 병사를 채울 만큼 거대했다.
그리스 함대 대부분이 떠날 채비를 하는 가운데 몇 사람이 목마를 끌고 오자 트로이군 내에서는 그 목마를 어떻게 처리할까의 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호기심의 대상이 된 목마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전리품으로 빨리 성 안으로 갖고 갈 것을 제의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하며 경계했다. 라오콘이라는 신관이 나타나더니, 그리스군은 간계에 능하니 목마 속에 있는 것을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순간 시논이란 이름의 그리스군 포로가 끼어들었다. 그는 오디세우스가 자기를 미워해 떨어뜨려 남게 된 자라고 신분을 밝히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리고 목마에 대해 말하기를, 그것은 여신의 비위를 맞추고 그리스군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것으로서, 거대하게 만든 것은 성내로 운반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트로이 성내로 들어가면 트로이군이 틀림없이 승리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트로이군은 목마를 성내로 끌어들이기로 결정하고 일정한 의식을 밟았다. 온종일 잔치가 계속되고 노래와 환호 속에 의식이 치러졌다. 이윽고 밤이 되자 목마 속의 그리스 병사들은 간첩 시논의 도움을 받아 밖으로 나오고, 대기하던 우군에게 성문을 열어줌으로써 그리스군은 성내로 일제히 쳐들어갔다. 그들은 성내에 불을 지르고, 잔치 끝에 쓰러진 트로이군을 모두 죽이고 트로이를 완전히 정복했다.


트로이 전쟁 전설을 보면 의문 나는 점이 많다. 그러나 트로이가 존재했다가 망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망하게 된 데는 전설처럼 목마의 함정과 같은 일은 없었을지 몰라도, 최소한 그와 같은 종류의 특별한 계략이 있었고, 트로이군은 거기에 쉽게 넘어갔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트로이군은 왜 라오콘의 제의대로 목마를 뜯어보지 않았을까? 왜 그렇게 우둔했을까? 이럴 때 우리는 정상적으로 생각하면 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사람은 곧잘 저지르곤 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즉, 인간은 언제나 현명하지 않고, 때때로 우둔하고 방심하고 실수를 저지른다.


당시 성을 공격하는 기술상 획기적 변화, 즉 공성장비를 개발하고 목마와 같은 거대한 충차를 제작하여 그것을 이용, 트로이 성문을 부수고 점령했을 가능성을 말하는 자도 있다. 그러나 일찍이 그리스인들이 그러한 공성장비를 사용했다는 역사적 근거는 호메로스가 살았던 시대에도 전혀 찾지 못하고 있다. 호메로스 자신이 살았던 철기시대의 전쟁술에 대하여도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보다 훨씬 전이었던 청동기시대의 트로이 전쟁에 대하여는 분명하지 않은 부분이 너무 많고, 그래서 트로이 전쟁은 다만 전설로 남아 있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트로이 전쟁 - 목마의 계략에 트로이 성 함락되다(BC 13세기)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2010.7.16, 가람기획)

2014년 1월 5일 일요일

[BC16~12세기] 아마존 전설




<기원전 540년경 그리스 도자기에 나타난 그림으로서, 전설 속의 인물인 아킬레우스가 아마존 족 여왕 펜테실레이아를 살해하는 모습>


인류의 오랜 역사를 통해 전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꾸준히 지속되어온 사람들의 습성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 같다. 고대 그리스와 중국처럼 문화수준이 높았던 지역에서 살았던 사람들도 전쟁을 늘 있는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현인들도 전쟁 자체는 싫어했지만, 그 불가피성이나 중요성에 대해서는 결코 의문을 품지 않았다.


전쟁은 사람들이 농업을 발견하고 집단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 통설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 구석기시대에도 사람들끼리 싸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조직화된 군대로 전략과 전술의 기술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싸우게 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였다. 신석기시대 집단 주거지의 출현은 농업의 발견 못지않게 전쟁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전략과 전술은 구석기시대의 습관화된 사냥 방식을 인간집단에 적용하면서 등장한 것이다. 즉 창 · 활 · 단검 · 손도끼 · 돌팔매 등을 이용하고 지휘관의 통제 하에 병사들이 대형을 갖추어 움직이게 된 것이다.


군사사학자(軍事史學者)들은 전쟁사를 연구할 때 기본적으로 문서상의 기록에 의존하며, 대부분은 역사학의 아버지 헤로도토스(Herodotos)가 최초로 기록을 남긴 페르시아 전쟁으로부터 출발점을 잡는다.


페르시아 전쟁 이전에도 전쟁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고고학적 발굴물들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다. 다만 기록이 없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싸웠는가는 잘 알 수 없다. 선사시대의 전쟁과 전략전술을 정확히 아는 일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먼 신화 또는 전설을 통해 선사시대 이야기를 들어왔는데, 그 가운데는 전쟁사를 이해하는 데 약간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있다.


그리스 신화와 전설 가운데는 아마조노마키(Amazonomachy)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이 그리스어는 여전사들로 구성된 아마존(Amazons) 족에서 유래한 말로서, 그리스 남자들로 구성된 전사들과 침략한 아마존 족 간에 벌어진 전투를 의미한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싸움 잘하는 아마존 족의 침략을 남자전사들이 나서서 격퇴시킴으로써 그리스를 지켰다는 내용을 주제로 삼고 있다. 말하자면 성 대결적인 전투에서 남자들이 승리하고 남자의 자존심을 지켰으며, 그 후 그리스 역사는 남자들이 주역을 담당하여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아마존 족의 존재와, 아마조노마키는 역사적 사실이었을까? 오늘날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매우 힘이 센 여자를 말할 때 '아마존'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아마존 족에 관한 전설은 남자의 무용(武勇)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리스 문화에서 정반대의 세계를 상상하는 가운데 지어낸 이야기들이지, 그것이 실제로 있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다. 그것은 상상의 세계를 다루는 문학이나 그림에서나 다루는 이야기일 뿐, 결코 사실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1950년대에 우크라이나 남부지방에서는 사르마트 족 전사들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기원전 4세기로 추정되는 그 무덤들의 약 20%가 여전사들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젊은 여자 두개골과 그들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활과 화살 · 화살통 · 단검 · 갑옷 등이 나오고, 두개골이 크게 상처받은 형태나 뼛속에 박혀 있는 청동제 화살촉 등이 발견된 것은 사르마트 족 가운데 여자전사들이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은 아마존 전설에서 여전사들이 활동한 지역 중 하나로 이미 알려진 곳이었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사르마트 족은 그리스의 젊은 청년들과 아마존 족의 일시적 결혼에 의해 생긴 후손들이었다.


여하튼 그 발굴은 아마존 족에 대한 전설이 어느 정도 사실에 기초한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했다. 그 후 사람들은 아마존 전설을 완전히 가공된 이야기로만 보기보다는, 적어도 여전사들이 전장에서 활개를 치던 한 시절이 있었고, 거기에서부터 크게 과장된 각종 이야기들이 전래되고 있다고 믿는 편이다. 전설을 통해 알려지고 있는 아마존 족의 생활과 전투방식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그리스 문학에서 아마존에 대한 최초 언급은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 나타난다. 그러나 아마존 전설은 청동기시대였던 기원전 16~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5세기에 헤로도토스는 전설을 모아 아마존 족의 생활방식을 설명했다. 그 후 다른 역사가들도 이를 점차 발전시키고 전투에 관한 전설을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그들에 의하면 아마존 족은 기존세계에서 멀리 떨어진 미개지에서 살았다. 그곳은 그리스로부터 당시에는 먼 세계였던 북아프리카와 러시아 남부지역이었다. 그러나 문명세계가 점차 확장되면서 아마존 세계는 축소되고 사라지게 되었다.


아마존 족은 지방에 따라 희한한 무기와 무장을 갖추었다. 어떤 이들은 큰 뱀가죽으로 무장하고 활 · 도끼 · 투창 등 무기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했다. 아마존 족은 모두 집안에서만 활동하는 그리스 여자들과 같은 역할을 경멸했다. 그들은 사냥과 전쟁을 일삼았으며, 점령지에서 젊은 남자들을 골라 섹스를 즐기고, 철저히 여아들만 양육하고 남아들은 처치해버렸다.


아마존 족의 전술은 그리스 남자전사들의 보병 위주 밀집대형과는 달리 주로 말을 타고 활을 사용하며 습격하는 식으로 전투를 벌였다. 그리스인들은 활을 비겁한 사람들이나 사용하는 무기로 간주했지만, 그들은 아마존 족 활 공격에 혼비백산하곤 했다.


그리스인들이 볼 때 아마존 족은 완전히 야만족이었고 그들과는 전혀 다른 별종이었다. 그리스 여자들과는 정반대로 그들은 전쟁을 좋아했고, 전쟁을 할 때도 그리스 남자들과는 정반대의 기술을 사용했다.


아마존 족의 최초 고향은 리비아였다. 이 지역에서 그들은 과일과 사냥감이 많아서 농경 대신 유목생활로 만족해하고 전쟁을 좋아하게 되었다. 전사들의 여왕 미리나(Myrina)는 제국 건설의 야심을 품었다. 그녀는 3만 명의 기병과 3천 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원정에 나섰다. 기병들은 질주하는 말을 타고 그 위에서 마음대로 방향을 바꾸어 활을 쏠 수 있을 만큼 기량을 갖추고 있었다.


미리나는 나일 강 서쪽에 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아틀란티스를 침입했다. 그곳은 플라톤과 그리스 철학자들이 이상향으로 생각한 전설의 땅이었다. 여전사들은 남자전사들을 모두 살육하고 여자들과 어린이들을 포로로 획득하면서 쉽게 그곳을 점령했다. 미리나는 그곳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고 정복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인접지역의 다른 종족들로부터 수차례 공격을 받고 미리나는 추종자들과 함께 동쪽으로 탈출했다.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강국이었던 이집트 국경에 이르렀을 때 이집트 왕은 아마존 족이 이집트를 지나 아라비아 지방으로 달아나도록 허용했다. 그 뒤 여전사들은 시리아를 거쳐 소아시아 지방으로 가서 그곳에 여러 도시를 세우고 정착했다. 그들은 그곳에서부터 서쪽 에게 해로 진출하려는 시도를 벌이면서 그리스와 잦은 충돌을 벌이고, 일부는 동북쪽 흑해를 건너 우크라이나 지역까지 진출했다.


아마존 이야기는 여자가 주로 아이를 기르고 음식을 만드는, 즉 가사를 돌보는 역이 아니고, 거꾸로 집 밖에서 사냥과 전쟁의 역을 맡고 용감하게 싸웠지만, 결국 남자전사들로만 구성된 그리스 군대의 영웅적인 행동에 패배하고 사라졌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린다. 즉, 아마조노마키에서 그리스인은 승리하고, 그 승리로 그리스의 미래가 밝게 펼쳐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마존 족의 용맹은 역사시대에도 높이 평가되어 알려지고 그 정신을 이으려는 노력이 다소 있었다. 로마의 네로 황제(AD54~68)는 아마존 방패를 든 여경호원을 두었고, 코모두스 황제(AD180~192)의 왕비는 아마존 복장을 했으며, 매년 12월을 아마존의 달로 정하고 검투사 시합을 벌였다.


신대륙 발견 시대에 아마존은 정복의 상징이 되었다. 콜럼버스와 코르테스를 위시한 탐험가들은 아마존에 대한 소문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전설과 소문에 따라 미국 캘리포니아 주는 여왕 '칼리파(Califa)'의 이름을 딴 것이며, 남미의 아마존 강이란 이름은 그 주위에서 얼룩덜룩한 옷을 입고 잽싸게 움직였던 여자 궁수들을 발견한 뒤에 생긴 것이다.


아마존 전설은 문자기록이 없던 선사시대에 사람들은 모계중심 사회를 구성하고 여존남비의 사상이 지배적이었을 가능성이 높았으며, 또 그 당시 전쟁에서는 여자들이 두드러진 활약을 했을 가능성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마존 전설 - 선사시대 모계중심 사회의 여전사들(BC 16세기 ~ BC 12세기)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2010.7.16, 가람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