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일 일요일

[BC490] 페르시아 전쟁과 마라톤 전투

1. 페르시아 전쟁
가. 페르시아 전쟁의 개요
 - 페르시아 왕 키로스는 대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소아시아 지역에 살고 있는 그리스계 이오니아 인들을 정복하고, 그들을 페르시아인 총독으로 하여금 직접 다스리도록 했다. 과거에 리디아가 이오니아 인들에게 자치권을 주었던 시절과는 아주 딴판이 되자, 이오니아 인들은 페르시아 지배에 크게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본국 그리스에서는 에레토리아 인들과 아테네 인들이 소규모의 지원부대를 파견했다. 페르시아는 이 반란을 진압하고 지배권을 다시 확립하게 되지만, 그러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렸다.

그 뒤 다리우스 1세는 반란을 영구히 막기 위하여 에게 해상의 주요 도서와 그리스 본토를 정복하기 위한 대원정에 나섰다. 페르시아 전쟁은 이렇게 하여 벌어졌다.

나. 페르시아 전쟁의 진행 과정



페르시아는 세 차례에 걸쳐 그리스를 침략했다. 1차원정(BC492)에서 다리우스는 그리스 북부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공략하고, 이어서 아테네를 정복하기 위한 육해군 대부대 작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작전 초기에 300척의 대함대가 태풍으로 침몰하는 바람에 1차원정은 실패로 돌아갔다.

2. 마라톤 전투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는 2차원정을 실시했다. 이번에는 에게 해를 직접 건너 에레토리아와 아테네를 직접 정벌할 계획이었다. 원정군 규모는 보병 2만 5천 명과 기병 1천 명이고, 600척의 군함을 이용했다. 당시 페르시아인들은 세계 최초로 대해군을 조직하여 에게 해를 장악하고 있었다. 해전에서는 군함의 수적 우세와 빠른 속도를 이용하여 적군 함대에 돌진, 적 선박들을 격침시키거나 못 쓰게 만들 수 있었다.






에게 해를 무난히 건넌 원정군은 먼저 일주일 만에 에레토리아를 점령하고, 다음 목표인 아테네를 공격하는 데 있어 주병력을 먼저 아테네 동북부 마라톤 해안에 상륙시켰다.




상륙 소식에 놀란 아테네 인들은 일단 모든 정치적 논쟁을 중단하고 대책을 강구했다. 그들은 급히 스파르타에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스파르타는 지원을 약속했으나, 종교행사가 끝나는 11일 후에야 병력을 파견하겠다고 답변했다. 아테네 인들은 성벽 뒤에서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해안지역으로 병력을 내보낼 것인지에 대해 격론을 벌였다.

이때 아테네 명장 밀티아데스(Miltiades) 장군은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퇴하자고 아테네 시민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스파르타의 지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수비를 취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으나, 적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상태에서는 승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밀티아데스는 1만 명의 시민병을 거느리고 진출하여 해안에서 야영하는 페르시아군을 굽어볼 수 있는 언덕에 진지를 편성했다. 한편 페르시아군은 1만 5천 명을 해안에 집결하고 나머지 1만 명은 아테네 공격을 위해 항해토록 했다.

3. 양익 포위 전술 등장






밀티아데스는 시간을 끌면 아테네로 돌아가 방어할 시간을 놓치게 되므로 마라톤 평원에서 서둘러 공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비록 병력이 열세하지만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고 적을 유인하여 공격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적을 난처하게 만들 특별한 전술대형을 창안했다. 이른바 양익포위 전술대형이었다. 전쟁사에서 매우 보편적인 대형이 된 이 대형은 마라톤에서 최초로 등장한 것이다.

밀티아데스는 양측면을 하천으로 보호할 수 있는 전장을 선정하여 그곳으로 적을 유인했다. 그는 병력이 열세하기 때문에 종심을 줄이고 그 대신 전면을 페르시아군과 일치하도록 길게 늘였다. 그리고 중앙을 얇게 하고 양측면에는 병력을 두껍게 배치했다. 반면에 페르시아군은 평소와 같이 8열 종심의 균일한 방진을 갖추었다.

양군 간 거리가 1.6㎞에 이르렀을 때 밀티아데스는 전진속도를 증가시켰다. 단, 중앙은 서서히 전진토록 했다. 페르시아군은 빠른 속도로 진군해오는 그리스군의 모습을 보고 그저 좋아했다. 기병도 없고 궁병도 없는 그들이 자멸의 길로 빠져들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군은 페르시아 궁병들의 사정거리(약 162m) 내에 들어가자마자 보다 신속한 속도로 공격하면서 활 공격을 받는 시간을 최소화했다. 그러면서 양측면에서 우세한 병력들은 페르시아군 대열을 부수기 시작하고, 뒤편 중심부를 향해 완전히 포위한 다음 전열이 흩어진 페르시아군을 크게 격파했다. 이런 상황은 단지 15분 사이에 전개된 일로서 페르시아군 보병은 미처 준비할 새도 없이 정신없이 당했다. 그리스군의 속도에 놀라고, 양측면 공격에 다시 놀랐으며, 기병과 궁병들도 손도 쓰지 못하고 도망가기에 바빴다.

이 전투에서 아테네 군은 192명의 손실을 입었으나, 페르시아군에게 6천 4백 명이나 되는 큰 손실을 입히고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스의 중보병 밀집대형은 밀티아데스의 과감한 전술 적용으로 동서양 간에 벌어진 최초의 전투를 승리로 장식했다.




이 승리를 알리기 위해 전령은 전속력을 다해 뛰었고, 그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우리는 승리했다"는 최후의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오늘날 마라톤 경기는 바로 마라톤 전투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전략가이며 사학자였던 풀러(J. F. C. Fuller)는 마라톤 전투의 승리는 곧 유럽이라는 아기가 탄생하면서 낸 소리였다고 말했다. 마라톤 전투 이후 세계사는 유럽을 비롯한 서양이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마라톤에서의 패배로 곧 전쟁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다리우스의 후계자 크세르크세스(Xerxes)는 보다 대규모의 침공준비를 갖추고 3차원정(BC480)을 실시했고, 그 결과 처음에는 곳곳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페르시아 함대가 살라미스 해전에서 크게 격파당한 이후 전세는 역전되었고, 결국 페르시아는 정복전쟁을 포기하게 되었다.

이 전쟁의 승리에 대해 그리스인들은 중장 보병의 승리, 창의 활에 대한 승리, 애국심의 승리, 전략전술의 승리 등으로 설명해왔다. 여기서 우리는 그러한 요인들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한편 그리스의 승리는 페르시아의 실수가 만들어준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페르시아군은 우수했으나 과신과 부주의로 결정적인 때에 과오를 저지르곤 했다. 예를 들면 마라톤에서 페르시아군이 포위된 것은 과신과 방심 때문이었고, 살라미스에서도 페르시아 함대가 부주의로 좁은 해협에 들어선 것은 큰 실수였다. 원정전쟁에서 과오는 그 영향이 매우 커서 몇 차례 거듭되면 패망을 초래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페르시아군이 보병 · 기병 · 궁병 등으로 편성되고 대규모의 해군을 보유한 사실을 마치 패배 요인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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