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22일 일요일

[BC3세기]카르타고 군대와 한니발



무적의 로마 군단이 이탈리아 반도뿐만 아니라 서지중해 일대를 석권하던 시절에 로마군에 강력히 도전해 한때 그 콧대를 크게 꺾었던 군대는 유럽이 아닌 아프리카의 군대였다. 바로 기원전 3세기 카르타고 군대였다.

본래 페니키아 인들이 기원전 814년 오늘날 북아프리카 튀니스 만 지역에 세운 카르타고는 상업도시국가로서 해상무역을 통해 부자 나라로 성장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매우 불안정했고, 토착민들로부터도 큰 지지를 받지 못했다. 더구나 인구가 적어서 자기 시민만으로는 군대를 구성하기가 어려웠다. 만일 성인남자를 군대에 동원해 전쟁에 내보냈다가 그들이 죽게 되면 도시 상가는 모두 문을 닫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카르타고는 축적한 부를 이용해 외국용병들을 들여오고, 그들로 하여금 전쟁을 수행하도록 했다. 따라서 평시에 상비군은 없었고 전시에만 용병군대에 의존했다.

카르타고 군은 로마 군단과 비교할 때 조직 · 훈련 · 무장 등 모든 면에서 열세였다. 카르타고 군은 고급사령부 · 기병 · 근위병 등을 제외하고는 주로 스페인 · 갈리아 · 누미디아를 비롯 기타 지역 출신의 용병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용감한 군인들이었으나 충성심이 결여되었고, 따라서 집단적으로 반란에 가담하거나 탈출하는 사태가 잦았다. 또한 보다 많은 보수를 지급받고자 하거나 다른 불만이 있을 때는 주저하지 않고 반기를 들었다. 이들을 지휘하는 장군은 카르타고 인 출신이었으나, 일반적으로 군사적 능력보다는 돈이 많은 사람이 선출되고 또한 자주 경질되었다.

공격전술은 그리스 방진의 전법과 비슷했으나 이탈리아의 산악지형에는 적합하지 않았고, 무기는 각 용병 출신별로 다양했다. 장창 · 단창 · 투창 · 검 · 도끼 · 활 등 무기를 잡다하게 사용, 무기체계가 통일되지 않았다. 다만 용병 가운데서도 누미디아 기병은 매우 우수했다. 지칠 줄 모르는 기질을 지닌 그들은 저돌적인 공격을 좋아했고, 그들이 타는 말조차도 용감하고 강인했다.







결국 로마군과 카르타고 군의 제1차 포에니 전쟁(BC264~241)에서 열세한 카르타고 군은 크게 패배해, 시칠리아 · 사르디니아 · 코르시카 등 지중해상의 전략적 요충들을 모두 상실하고 말았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그러나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완전한 역전을 이루게 되는데, 이는 전적으로 걸출한 명장 한니발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니발은 도저히 통합이 어렵다고 여겨지던 카르타고 군의 이질적 요소들을 오히려 한데 모아 더 큰 힘을 발휘하도록 하고, 병사들을 고무시키고 자기를 따르게 하는 비범한 통솔력을 가졌으며, 적의 약점을 최대로 활용하는 혜안을 소유한 군사적 천재였다.

스페인과 갈리아 지방에서 명성을 떨친 후 일약 최고사령관으로 승진한 한니발은 카르타고 인들의 숙원사업인 로마 정복에 나서 원정부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갔다. 당시 어느 누구도 육로를 통해 이탈리아를 공격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탈리아 침략에 앞서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한니발은 본국에 스페인 용병을, 스페인에 누미디아 용병을 교차 배치했다. 반란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본래 로마의 전략은 군을 이분해 각각 카르타고와 스페인에 원정군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니발의 기습적인 알프스 횡단 소식을 듣고는 곧 전군을 모아 한니발에 대항하도록 했다. 하지만 카르타고 군과 로마군 간에 벌어진 북부 이탈리아의 트레비아 강 전투(BC218)트라시메네호 전투(BC217)의 양대 전투에서 로마군이 대패, 로마 정부와 시민들은 크게 놀랐다.

로마군은 단순히 정면 대결하여 힘을 겨루는 방법에만 숙달되어 있었기에, 기습과 기만의 천재 한니발의 의표를 찌르는 작전에 속수무책이었다. 로마인들은 한니발에 대해 정정당당하지 못하다고 비난했지만, 그것은 단지 패자의 변명에 불과했을 뿐이다.

정보대를 이용하여 적의 배치를 완전히 파악하고, 지형을 최대로 활용해 함정을 만드는 한니발의 전법은 매번 적을 당황케 했다. 급기야 로마군은 공포감에 빠져서 기습소식만 듣고도 도망병이 속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어려울 때 기습 · 패배 · 공포 · 도주로 이어지는 것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법인데, 바로 그런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후 로마는 전장에서 한니발을 피하고, 그 대신 로마 지도자 파비우스(Quintus Fabius)의 주장에 따라 지연전을 전개하여 한니발을 지치게 하는 전략을 택했다. 로마인들은 한니발로 인해서 그들이 자랑하는 로마 군단의 전통과는 배치되는 전략개념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후 사람들은 전쟁에서 이용되는 지연전 위주의 전략을 '파비우스 전략'이라고 불렀다.
[네이버 지식백과] 카르타고 군대와 한니발 - 북아프리카 군대가 로마 군단을 격파하다(BC 3세기)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2010.7.16, 가람기획)

칸나이전투

트레비아 강 전투(BC218)

트라시메네호 전투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