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펠로폰네소스 전쟁 개요
페르시아를 꺾은 다음 그리스는 동지중해 지역을 완전히 지배했다. 그러나 그리스 내부에서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한 두 도시국가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두 동맹이 탄생하여 서로 대결하는 체제로 들어갔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델로스 동맹, 그리고 스파르타를 중심으로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이었다.
정치적으로 아테네는 민주정치를, 스파르타는 과두정치를 대표하는 국가였다. 군사적으로 아테네는 해군, 스파르타는 육군에 주로 의존했다. 이 두 동맹 간에는 결국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를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고 부른다.
2.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과정
전쟁은 크게 3단계로 나뉘었다. 아르키다모스(Archidamos) 전쟁이라고 부르는 제1단계(BC431~421)는 스파르타 왕 아르키다모스의 아테네 침공으로 시작되었다. 양측은 10년 동안이나 소모전을 치르고도 아무런 결과 없이 끝났다. 제2단계(BC421~415)는 양측이 휴전을 맺고 전쟁 이전 상태로 돌아갔다. 그러나 제3단계(BC415~404)에서 아테네가 시칠리아의 내전에 개입하고 원정군을 보냄으로써 다시 큰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 지원을 받은 시라큐스와의 싸움에서 크게 고전한 끝에 패배했다. 한편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도움을 받아 함대를 강화하고, 육전뿐만 아니라 해전에서도 곳곳에서 아테네 군을 제압했다. 결국 기원전 404년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항복했고,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을 파괴하도록 강요당했으며, 함대를 스파르타에 인도함으로써 전쟁은 완전히 끝이 났다.
27년간의 내전을 치르면서 그리스인들은 많은 새로운 전쟁기술을 적용했다. 그들은 종전처럼 한나절 전투로 끝나는 것이 아닌, 수년 동안 수많은 전투로 연결된 전쟁에서 중보병 밀집대형에만 의존해서는 승리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일찍부터 아테네는 병력이 열세한데다가 스파르타의 중보병이 워낙 강력하기 때문에 변방지역을 포기하고 도시 성곽을 지키는 방어 전략을 택했다. 대부분의 아테네 인들이 가족과 함께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도 시민군대는 이곳저곳 모든 전장에 참여할 수 없었다. 반면에 스파르타는 20만 명에 이르는 노예들에게 농업을 맡기고, 군대는 평생 전쟁만을 맡아 하도록 했다. 한편 아테네는 함대를 강화하고, 해상작전으로 펠로폰네소스 주변에 대해 공격하는 전략을 폄으로써 육군 위주로 행해지는 스파르타의 작전을 견제했다.
그리스인들은 아테네나 스파르타나 공히 과거 페르시아인들이 사용한 전법을 많이 도입했다. 예를 들면, 함대 · 경보병 · 기병 · 궁병 등이 그것인데, 이들 가운데는 지형과 적정을 살피는 척후병도 있었다. 그리고 직업적으로 전투를 하는 용병들이 일부 사용되기도 했다. 고대 중 · 근동 지역에서 꽃을 피웠던 다양한 형태의 전술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때로는 척후병과 경기병이 중보병을 무력화시키기도 함으로써 전통적인 중보병이 체면을 잃게 되었다. 사실상 중보병에만 의존하는 군대는 다양한 병종으로 구성된 군대보다 약점이 많았다.
그러나 중보병 제도에 오랫동안 집착한 것은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에 대한 승리를 한없이 기릴 뿐만 아니라, 패배한 국가로부터 군사제도를 빌어올 수 없다는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도덕적으로도 그리스인들은 중무장 밀집대형에 대해 특별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시민 평등사상의 정치제도의 산물이자 동시에 공개적으로 정정당당하게 힘을 겨루는 남성사회를 상징하는 제도였다.
그런 전통을 지키기 위해 전쟁 중 아테네 인들 가운데는 도시 성벽을 무너뜨리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면 아테네가 스파르타만큼 강력한 중무장 보병 집단을 양성하는 자극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중무장 보병끼리만 수행하는 정도로 단순한 전쟁은 아니었다. 그리스인들은 본래 모방을 싫어하지만, 점차 복잡해져가는 전쟁에서는 다른 국가로부터 배운 다양한 전법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고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 펠로폰네소스 전쟁 -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싸움(BC 431년 ~ BC 404년)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2010.7.16, 가람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