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31일 토요일

[BC4세기] 로마 군단

1. 로마군단
 가. 고대 도시 국가 로마
고대 도시국가 로마는 기원전 753년에 수립되었다. 로마인들은 이탈리아 중서부 일대에 흩어져 살던 여러 부족 가운데 가장 우수한 부족으로서, 생활력이 강하면서도 지도자에게는 복종을 잘하는 사람들이었다. 공동체 의식이 강한 그들 가운데서 강인한 전사들과 훌륭한 정치가들이 많이 배출됐다.

그들은 그리스인들과 달리 실질적인 것을 추구했고, 도시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반 요소들을 적절히 잘 조절할 줄 알았다. 그러나 밖으로 도시를 지키는 데 있어서는 죽음을 불사하고 전장에 나섰다. 그들은 도덕을 중시하고 도덕적 잘못에 대해서 용서하지 않았다. 이러한 우수한 잠재력을 바탕으로 로마인들은 일찍부터 민주적 정치제도를 발전시키고 인접 지역들을 하나하나 흡수하면서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기원전 509년 이후 로마인들은 왕정체제를 버리고 공화정 체제를 따랐다. 최고 지도자로는 두 사람의 통령을 선출해 그들이 각각 1년씩 통치하도록 했는데, 이 제도는 500년간 지속되었다.

나. 로마군단 창설
  - 로마는 라틴 동맹을 이끌고 중부를 지배했다. 그러나 기원전 326년부터 약 30년간은 남부 이탈리아의 삼나이트(Samnites) 족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을 받아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 로마인들은 보다 잘 싸우기 위해 군을 대대적으로 개편하는 작업을 벌여, 그동안 모방해온 그리스 군사제도를 과감히 떨쳐버리고 그들 고유의 정치적 특성과 전투환경에 맞는 이른바 '로마 군단'을 창설했다.

2.로마 군사 제도
로마 군사제도에 대해 말할 때는 기원전 6세기 공화정 출범 때부터 기원후 4세기 로마 제정 몰락 때까지 무려 1천 년에 걸친 전 기간 중 어느 때를 보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그러나 공화정 때 건설한 '로마 군단'은 로마군의 특성이 가장 잘 나타난 대표적인 것이며, 이를 기반으로 해 그 후의 군사제도는 약간씩 변천을 거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로마 군단'은 기본적으로 그리스의 방진과 같은 개념으로 전투를 하는 보병 밀집대형이었다. 그러나 그리스군에 비해 '로마 군단'은 여러 종류의 보병으로 팀워크를 발휘하면서 훨씬 발전된 전법을 구사했다.

'로마 군단'은 시민들로 구성된 민병대였다. 로마 시민들은 로마군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의무라기보다 시민으로서 누리는 하나의 특권으로 간주했고, 그들에게 가장 가혹한 처벌 가운데 하나는 전장에 나가는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었다.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이나 노예들은 로마군이 될 수 없었다. 시민병들은 각자 자기 무기와 갑옷을 준비하여 싸우고, 그러한 장비를 휴대한 사실 자체를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로마 군단'은 상비군도 아니고 직업군인도 아니지만 잦은 전투경험과 평시에 정기적인 꾸준한 훈련을 통해 언제나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로마 군단'의 전통에 대한 긍지와 조국애가 지극했기 때문에 전장에 나가 잘 싸울 수 있었다.

'로마 군단'은 이탈리아의 산악지형에서 나타나는 그리스 방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서, 밀집대형을 유지하면서도 개개 병사의 기량을 중시했으며, 이를 위해 개개인 간격을 넓히고 전체대형 내에 여러 전술부대를 운용했다.

'로마 군단'에서 기초전술 단위부대는 10×12(10오 12열)명으로 구성된 중대로서, 이러한 중대들이 수십 개 모여 '로마 군단'을 이루었다. 중대 대형은 전술적 상황에 따라 종심(縱心)을 달리하며 6×20 또는 3×40의 형태로 운용되기도 했다.

로마 보병들은 중보병과 경보병으로 대별되고, 중보병은 다시 하스타티(Hastati), 프린시페(Principes), 트리아리(Triarii) 등 3종류로 구분되었다. 이들은 연령별로 편성되었는데, 하스타티는 25~30세, 프린시페는 30~40세, 트리아리는 40~45세에 해당하고, 벨리테(Velites)라고 부르는 경보병은 17세에서 25세 사이의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연령별로 중대를 편성한 이유는 동일한 전투경험과 체력을 기초로 한다는 원칙에 입각한 것이며, 또한 전우애를 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이점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로마 군단'은 제1전열에 하스타티 10개 중대, 제2전열에 프린시페 10개 중대, 제3전열에 트리아리 5개 중대를 모아 주력부대를 형성하고, 제1전열 전방에 벨리테 10개 중대의 정찰부대를 배치했다. 따라서 1개 로마 군단은 총 4,200명으로 편성되었다. 그리고 양측방에는 기병 10개 소대 총 300명을 나누어 배치해 로마 군단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로마군의 규모는 시대에 따라 그리고 전투상황에 따라 다르나, 통상 최고사령관인 통령은 4개 로마 군단 정도를 지휘했다.


3. 로마 무기 체계

로마 병사들이 사용한 무기는 그리스 군대와는 크게 달랐다. 그들은 장창 대신 투창을 사용했고, 주무기는 글라디우스라는 로마 검이었다. 이 검은 22인치(약 56㎝)의 양날 검으로서, 육박전을 전개하면서 적을 무자비하게 살해하는 데 사용되었다. 투창은 약 20m 거리에 이르렀을 때 던지는데, 제대로 맞으면 아무리 튼튼한 갑옷도 관통할 만큼 치명적이었다. 이러한 무기로 말미암아 로마 시대의 전쟁방식은 그리스 시대보다 한층 더 살상도가 높고 잔인했다.




로마군은 평지뿐 아니고 구릉과 산비탈 지역에서도 싸웠다. 그들에게 있어 전장 선정은 중요했으며, 적보다 높은 위치를 점령하면 투창을 던지는 데 단연코 유리했다. 또한 태양과 바람을 등지고 싸우는 편이 적의 움직임을 제대로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훨씬 더 잘 싸울 수 있었다.

4. 로마 군단 전술 전락
나팔 신호와 함께 전투가 개시되면 로마 군단은 고함을 지르며 전진했다. 가장 먼저 최전열의 벨리테 중대들은 투창을 던져서 적진을 흔들어놓고, 그 후 뒤따라온 주력부대 사이사이로 후퇴했다. 이어서 하스타티 중대들이 투창을 던지고 검을 휘두르며 본격적인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그들이 밀리거나 기진맥진하게 되면 프린시페 중대들이 전진해 구원했다. 트리아리 중대들은 매우 위급하거나 또는 최후 상황에서 노련한 수법으로 틈새를 통해 들어가 전투를 결정지었다. 양측방의 기병은 보병이 전투를 벌이는 동안 적 기병과 교전하고, 아군의 승리가 확실해질 때는 벨리테 중대들과 함께 추격전을 전개했다.

각 전열 간 교체 및 협조는 사이사이 기동공간을 통해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각 중대 간 좌우간격은 중대의 폭만큼 넓었고, 앞뒤 전열 사이는 활 사거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70m 정도를 유지했다. 로마 군단은 그러한 충분한 공간을 활용해 기동성과 신축성을 살리면서 장소 · 시간 · 목적이 다른 여러 가지 전술상황에서도 훌륭하게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 로마 군단이야말로 고대 서양 전술에서 꽃 중의 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로마 군단 - 투창과 검을 사용한 로마군 밀집대형(BC 4세기)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2010.7.16, 가람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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