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31일 토요일

[BC4세기] 로마 군단

1. 로마군단
 가. 고대 도시 국가 로마
고대 도시국가 로마는 기원전 753년에 수립되었다. 로마인들은 이탈리아 중서부 일대에 흩어져 살던 여러 부족 가운데 가장 우수한 부족으로서, 생활력이 강하면서도 지도자에게는 복종을 잘하는 사람들이었다. 공동체 의식이 강한 그들 가운데서 강인한 전사들과 훌륭한 정치가들이 많이 배출됐다.

그들은 그리스인들과 달리 실질적인 것을 추구했고, 도시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반 요소들을 적절히 잘 조절할 줄 알았다. 그러나 밖으로 도시를 지키는 데 있어서는 죽음을 불사하고 전장에 나섰다. 그들은 도덕을 중시하고 도덕적 잘못에 대해서 용서하지 않았다. 이러한 우수한 잠재력을 바탕으로 로마인들은 일찍부터 민주적 정치제도를 발전시키고 인접 지역들을 하나하나 흡수하면서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기원전 509년 이후 로마인들은 왕정체제를 버리고 공화정 체제를 따랐다. 최고 지도자로는 두 사람의 통령을 선출해 그들이 각각 1년씩 통치하도록 했는데, 이 제도는 500년간 지속되었다.

나. 로마군단 창설
  - 로마는 라틴 동맹을 이끌고 중부를 지배했다. 그러나 기원전 326년부터 약 30년간은 남부 이탈리아의 삼나이트(Samnites) 족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을 받아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 로마인들은 보다 잘 싸우기 위해 군을 대대적으로 개편하는 작업을 벌여, 그동안 모방해온 그리스 군사제도를 과감히 떨쳐버리고 그들 고유의 정치적 특성과 전투환경에 맞는 이른바 '로마 군단'을 창설했다.

2.로마 군사 제도
로마 군사제도에 대해 말할 때는 기원전 6세기 공화정 출범 때부터 기원후 4세기 로마 제정 몰락 때까지 무려 1천 년에 걸친 전 기간 중 어느 때를 보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그러나 공화정 때 건설한 '로마 군단'은 로마군의 특성이 가장 잘 나타난 대표적인 것이며, 이를 기반으로 해 그 후의 군사제도는 약간씩 변천을 거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로마 군단'은 기본적으로 그리스의 방진과 같은 개념으로 전투를 하는 보병 밀집대형이었다. 그러나 그리스군에 비해 '로마 군단'은 여러 종류의 보병으로 팀워크를 발휘하면서 훨씬 발전된 전법을 구사했다.

'로마 군단'은 시민들로 구성된 민병대였다. 로마 시민들은 로마군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의무라기보다 시민으로서 누리는 하나의 특권으로 간주했고, 그들에게 가장 가혹한 처벌 가운데 하나는 전장에 나가는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었다.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이나 노예들은 로마군이 될 수 없었다. 시민병들은 각자 자기 무기와 갑옷을 준비하여 싸우고, 그러한 장비를 휴대한 사실 자체를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로마 군단'은 상비군도 아니고 직업군인도 아니지만 잦은 전투경험과 평시에 정기적인 꾸준한 훈련을 통해 언제나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로마 군단'의 전통에 대한 긍지와 조국애가 지극했기 때문에 전장에 나가 잘 싸울 수 있었다.

'로마 군단'은 이탈리아의 산악지형에서 나타나는 그리스 방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서, 밀집대형을 유지하면서도 개개 병사의 기량을 중시했으며, 이를 위해 개개인 간격을 넓히고 전체대형 내에 여러 전술부대를 운용했다.

'로마 군단'에서 기초전술 단위부대는 10×12(10오 12열)명으로 구성된 중대로서, 이러한 중대들이 수십 개 모여 '로마 군단'을 이루었다. 중대 대형은 전술적 상황에 따라 종심(縱心)을 달리하며 6×20 또는 3×40의 형태로 운용되기도 했다.

로마 보병들은 중보병과 경보병으로 대별되고, 중보병은 다시 하스타티(Hastati), 프린시페(Principes), 트리아리(Triarii) 등 3종류로 구분되었다. 이들은 연령별로 편성되었는데, 하스타티는 25~30세, 프린시페는 30~40세, 트리아리는 40~45세에 해당하고, 벨리테(Velites)라고 부르는 경보병은 17세에서 25세 사이의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연령별로 중대를 편성한 이유는 동일한 전투경험과 체력을 기초로 한다는 원칙에 입각한 것이며, 또한 전우애를 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이점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로마 군단'은 제1전열에 하스타티 10개 중대, 제2전열에 프린시페 10개 중대, 제3전열에 트리아리 5개 중대를 모아 주력부대를 형성하고, 제1전열 전방에 벨리테 10개 중대의 정찰부대를 배치했다. 따라서 1개 로마 군단은 총 4,200명으로 편성되었다. 그리고 양측방에는 기병 10개 소대 총 300명을 나누어 배치해 로마 군단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로마군의 규모는 시대에 따라 그리고 전투상황에 따라 다르나, 통상 최고사령관인 통령은 4개 로마 군단 정도를 지휘했다.


3. 로마 무기 체계

로마 병사들이 사용한 무기는 그리스 군대와는 크게 달랐다. 그들은 장창 대신 투창을 사용했고, 주무기는 글라디우스라는 로마 검이었다. 이 검은 22인치(약 56㎝)의 양날 검으로서, 육박전을 전개하면서 적을 무자비하게 살해하는 데 사용되었다. 투창은 약 20m 거리에 이르렀을 때 던지는데, 제대로 맞으면 아무리 튼튼한 갑옷도 관통할 만큼 치명적이었다. 이러한 무기로 말미암아 로마 시대의 전쟁방식은 그리스 시대보다 한층 더 살상도가 높고 잔인했다.




로마군은 평지뿐 아니고 구릉과 산비탈 지역에서도 싸웠다. 그들에게 있어 전장 선정은 중요했으며, 적보다 높은 위치를 점령하면 투창을 던지는 데 단연코 유리했다. 또한 태양과 바람을 등지고 싸우는 편이 적의 움직임을 제대로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훨씬 더 잘 싸울 수 있었다.

4. 로마 군단 전술 전락
나팔 신호와 함께 전투가 개시되면 로마 군단은 고함을 지르며 전진했다. 가장 먼저 최전열의 벨리테 중대들은 투창을 던져서 적진을 흔들어놓고, 그 후 뒤따라온 주력부대 사이사이로 후퇴했다. 이어서 하스타티 중대들이 투창을 던지고 검을 휘두르며 본격적인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그들이 밀리거나 기진맥진하게 되면 프린시페 중대들이 전진해 구원했다. 트리아리 중대들은 매우 위급하거나 또는 최후 상황에서 노련한 수법으로 틈새를 통해 들어가 전투를 결정지었다. 양측방의 기병은 보병이 전투를 벌이는 동안 적 기병과 교전하고, 아군의 승리가 확실해질 때는 벨리테 중대들과 함께 추격전을 전개했다.

각 전열 간 교체 및 협조는 사이사이 기동공간을 통해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각 중대 간 좌우간격은 중대의 폭만큼 넓었고, 앞뒤 전열 사이는 활 사거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70m 정도를 유지했다. 로마 군단은 그러한 충분한 공간을 활용해 기동성과 신축성을 살리면서 장소 · 시간 · 목적이 다른 여러 가지 전술상황에서도 훌륭하게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 로마 군단이야말로 고대 서양 전술에서 꽃 중의 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로마 군단 - 투창과 검을 사용한 로마군 밀집대형(BC 4세기)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2010.7.16, 가람기획)

2014년 5월 9일 금요일

[BC770~BC221] 춘추전국시대 전쟁


1.동양 전쟁사의 한계점
우리는 세계전쟁사가 대부분 서양 위주로 기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가장 먼저 손꼽을 수 있는 것은 자료 문제를 들 수 있다. 서양 자료는 비교적 풍부하고 상세한 기록을 담고 있는 데 반해, 동양 자료는 빈약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동양 자료는 전쟁기록은 많지만 '싸움이 있었다'는 식으로 간단히 기록되어 있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싸웠는가에 대하여 생략된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것이 한계다. 더구나 동양문화는 서양문화와 달리 각 나라와의 활발한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각국의 전쟁사는 자국 아닌 다른 국가 사람들의 관심까지 크게 끌지는 못했다.

그 결과 충분한 실증과 토론을 거치지 못한 동양 전쟁사는 별로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는 편이다. 또한 과학과 기술혁명 이후 전쟁과 군대는 서양에 기원을 둔 아이디어들이 판을 쳐왔고, 오늘날 그 현상은 더 두드러져 결국 서양 전쟁사가 더 중시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춘추전국시대 개요
고대 중국은 고대 이집트 · 페르시아 · 그리스 등보다 더 문화수준이 높았던 국가였다. 특히 춘추전국시대(BC770~221)의 중국문화는 과학의 발달이 세계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 근세 이전까지를 역사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도덕 · 정치 · 군사 · 사회생활 등에 관한 학술 및 예술의 발달은 눈부셨다. 공자 · 맹자 등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의 사회사상이 이 시대에 다 나왔다. 그래서 이후 중국은 그 시대를 앞서는 문화창조가 어려워 모든 사회생활에 보수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다고 역설적으로 말하는 역사가들도 있다.

고대 중국인들에게 있어 중국 전체 땅덩어리는 국가가 아닌 세계였다. 그래서 '천하(天下)'라고 불렀다. 천하 내에는 여러 제후국(諸侯國)들이 난립했다. 제후국들 간에는 수시로 분쟁과 통합 또는 분열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제후국 숫자는 시대별로 달랐다. 강자가 등장하여 천하를 통일하면 한 나라를 이루고, 다시 분열되면 여러 나라로 나뉘었다. 그래서 고대 중국역사를 보면 왕조의 잦은 교체로 얼룩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는 약 550년에 걸친 기간으로서 고대 중국의 큰 변혁시대였다. 진(秦)이 천하를 통일하고 중앙집권체제를 시작하기 전까지의 봉건적 제후들이 군웅할거했던 과도기였다. 이 시대는 다시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나뉜다. 춘추시대(BC770~403) 초기 제후국은 140여 국이나 되었으나, 계속 통합하면서 감소되더니 전국시대에 들어서서는 진(秦) · 초(楚) · 연(燕) · 제(齊) · 한(韓) · 위(魏) · 조(趙) 등 7국으로 재편되었다.





춘추시대의 전쟁방법은 거의 같은 시대의 서양에서 유행하던 방법과 유사했다. 주로 제후나 장수들이 전투용 마차를 타고 들판에서 싸웠으며, 전차 1량에 30인의 보병이 붙었지만 그들의 역할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당시는 청동기시대로서, 제한된 구리 생산량 때문에 장수들만 장검을 휴대하고 싸웠다. 이때 전투는 일반적으로 짧은 시간 내에 끝나고, 결과에 따라 제후국들 간의 합병이 잇따랐다.

전국시대에 7강국 간 전쟁은 보다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고, 적과 우방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며 싸웠기 때문에 극히 혼란스러웠다. 이들이 철제무기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보병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철이 생산되었을 때 초기에는 주로 농구(農具)로 이용했으나 차츰 무기로 사용했다. 보병들은 철로 만든 장창과 방패를 휴대하고 철제 화살촉을 이용했다.

3.춘추전국시대 전술 전략
전투양상은 차츰 전차전으로부터 보병전으로 바뀌고 그 규모도 훨씬 커졌다. 들판뿐만 아니라 산간지역에서도 싸웠다. 그러나 중국보병은 서양보병처럼 중무장하지도 않았고, 방진대형을 취하지도 않았다. 비교적 가볍게 무장하고 지형에 따라 다양한 대형으로 싸웠다. 그리고 기습을 많이 실시하고 여러 가지 전법을 구사했다. 당시 서양에서는 전법이 매우 단순했던 데 비해 중국인들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전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특히 적을 기만, 유인하는 기술에 있어서는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동서양은 문화수준에 큰 차이가 나는 만큼 전법에서도 차이가 컸다. 서양에서 주 공격무기는 창이었으나 동양에서는 활이었다. 서양전사들은 정면대결을 벌이고 죽을 때까지 싸우는 직접적인 전투를 좋아하고, 동양인들은 바로 맞부딪치기보다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화살을 날리며 적을 쇠진시켜 패배시키는 전술을 선호했다.

전국시대의 전쟁은 각국이 20만 명 이상의 대규모 군대를 동원했다. 전국시대 말기 진(秦)나라가 조(趙)나라 군대를 격파했을 때는 조나라 병사 40만 명을 생매장했다고 하는데, 그 정도로 대규모의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각국 제후들은 스스로 왕을 자칭하고 천하를 평정하기 위한 전쟁을 계속했다. 고대 중국이 통일되기 전의 대내전이었다. 결국 내전 끝에 진나라가 천하를 제패했다. 진나라는 어느 나라보다도 정치개혁과 부국강병책 추진을 훌륭하게 실시하고 천하를 통일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후 진나라는 봉건제도를 해체한 후 중앙집권체제를 채택하여 절대권력자인 황제가 천하를 마음대로 움직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춘추전국시대의 전쟁 - 수준 높은 전법 구사(BC 770년 ~ BC 221년)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2010.7.16, 가람기획)

4.철기 확산과 군사기술의 변혁
전국시대는 커다란 변혁기였다. 이제 신석기 말기 이래의 성읍국가 체제는 마감되고 영역국가가 출현하고 확대되면서 거대한 고대제국의 출현이 예고되고 있었다. 그 배경에는 철기의 발명으로 대변되는 기술상의 대혁신이 있었다.

철기는 지배계급의 상징물에 불과했던 청동기와는 달리 사회 전반에 커다란 파문을 던졌다. 청동기 시대에도 생산용구는 대개 석기와 목기였기에 생산력 수준도 신석기 시대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따라서 상주 시대 고도의 청동문명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부가 집중된 결과였다. 그러나 점차 금속 제작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춘추 중기에 이르면 보다 단단한 철기가 발명되고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철기는 보다 예리한 무기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농기구로도 널리 사용됨으로써 정치, 군사, 경제, 사회 전반에 커다란 변혁을 초래했다.

철제 농기구는 땅을 보다 깊이 갈 수 있게 했으며, 여기에 소를 경작에 이용하는 우경이 시작되어 인간의 근력에만 의존하던 농경은 비약적 발전을 거듭했다. 이를 제2의 농업혁명이라 부른다. 이제 기계화 이전의 오랜 전통 농업사회의 기본적인 생활양식이 마련된 셈이었다. 예전에는 쓸모없던 땅에 불과했던 황무지가 개간되고 단위면적당 생산량도 크게 증가하게 되었다. 각국은 다투어 대규모 수리사업을 벌여 농지를 더욱 확대해 나갔다.

농업기술의 진전에 따라 집단농경에 의존하던 농업경영 방식은 소가족 단위의 생산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점차 사회조직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이 새로운 물결을 재빨리 인식하고 개혁을 가속화시킬 수 있는 나라가 장차 통일제국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주산업인 농업생산의 발달로 경제 전반에 생기가 넘쳤다. 수공업, 상업 등이 농업에서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특히 제철업, 제염업의 발달이 돋보였다. 제철업은 각종 농구와 무기의 수요 폭증에 따라 눈부신 발전을 보였다. 제나라의 수도 임치에서 발굴된 야금유적지는 넓이가 십여만 제곱미터에 달했으며, 곳곳에서 발굴된 주조장에서는 철제 농기구가 다량으로 발굴되었다. 사람들은 이때 이미 산 위에서 적갈색 흙이 발견되면 그 아래에 철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으며, 당시 철이 출토된 산이 3,609개 소였다는 기록이 있다.

각국의 산물이 활발히 교환되어 원격지 무역을 통해 재부를 축적한 대상인들이 출현했는데 진(秦)나라의 여불위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화폐는 이미 춘추시대에 출현했으나 전국시대에 널리 보급되어 농기구 모양의 포전, 칼 모양의 도전이 널리 사용되었다. 산업발달의 거대한 흐름은 또 다른 면에서 각국 국경의 철폐를 요구하고 있었다. 각국의 화폐, 도량형 등의 차이는 상업의 발달에 제약이 되고 있었으며, 국경을 넘어 한 줄기로 흐르는 강물에 대한 대규모 수리사업이 요청되고 있었다.

각국의 왕들은 각기 부국강병에 힘써 스스로 통일의 주역임을 자임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직접적으로는 군사력의 우열로 판가름 날 성질의 것이었다. 따라서 전국시대에는 군사상으로도 커다란 변화가 뒤따랐다.

춘추시대에도 서융 · 백적 · 적적 · 북적 · 선우 · 산융 등으로 불리던 유목민족들은 중국의 북방을 위협했다.
전국시대의 전쟁에 비하면, 춘추시대의 전쟁은 거의 낭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춘추시대의 전쟁이란 청동제 칼과 창으로 무장한 귀족들이 4, 5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싸우는 전차전이었으며 귀족전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대규모 전차전에 적합한 중원 지역을 벗어나 구릉지대인 서북쪽과 강들이 많은 동남쪽으로 확대되면서 전차의 역할은 크게 줄어들었다. 이를 대신해 기동력 있고 장거리 작전이 가능한 보병과 기병의 역할이 커졌다. 풍부한 군사지식과 지략을 갖춘 신흥 장수들이 등장해 귀족들이 갖고 있던 군사지휘권을 빼앗았으며, 야인과 노예들도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제 전쟁은 더 이상 귀족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커다란 사회 변동이 동반되고 새로운 형태의 국가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국시대에 이르면, 춘추말기 강남의 오 · 월에서 시작된 평민병사의 보병전이 전투의 중심이 되었다. 보병부대는 산림과 소택지에도 자유로이 신출귀몰했으며, 쇠뇌라는 발사 용구가 발명되면서 사정거리가 길어져 수레 위에서의 사격전은 이미 효력을 상실했다. 북방의 조나라에서는 유목민족의 기마전술을 채용하기도 했다.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높다란 성벽들이 올라가고 기병이 출현하면서 전쟁터가 넓게 확장되었다.

춘추시대의 전쟁은 한 번의 싸움으로 승패가 판가름 나고 수도 방위에 치중하는 야전이었지만, 전국시대에는 주요 도시 및 변경에 이르기까지 성을 거점으로 끈질긴 공방전이 벌어졌다. 춘추시대의 초강대국 진(晉), 초(楚)의 싸움에서는 전차 4천 승, 즉 많아도 4만 정도의 병력이 동원되었으나, 전국시대의 각국은 60만에서 100만의 대군이 동원되었다.


이제 전쟁은 귀족들의 영예가 아니라, 평민 모두가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되었다. 전리품의 획득과 상대국의 복속에 목적을 두었던 전쟁은 토지의 획득과 적국 병력의 말살로 바뀌었다. 순수한 무장이 출현하게 되었으며, 전쟁의 이론과 작전을 연구하는 병법이 발전하여 유명한 《손자병법(孫子兵法)》이 출현하기도 했다.

사력을 다한 각국의 경쟁 속에서 엄청난 사상자가 속출하였고 백성들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의 위협 속에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묵자의 반전론이 백성들에게 커다란 공감을 받았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에는 묵가가 가장 인기 있는 학파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철기의 확산과 군사기술의 변혁 - 제2의 농업 혁명(기원전 5세기 전후)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3.23, 가람기획)

4. 춘추 5패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고사성어로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말이 있다. '울퉁불퉁한 땔나무 위에 누워 잠을 자고 쓰디 쓴 곰쓸개 맛을 보며' 패전의 굴욕을 되새기는 모습은 춘추시대 각국의 치열한 생존경쟁의 단면을 보여준다. 와신상담하지 않고서는 살아남기가 어려웠다. 춘추 초기에 주왕으로부터 봉해진 제후국은 총 140여 개였으나 춘추 말기에는 진(秦), 초(楚), 제(齊), 한(韓), 위(魏), 조(趙), 연(燕)의 7개국으로 정리되었다. 기록에 남겨진 전쟁의 횟수만도 1,200회가 넘는다.

상나라 때는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였다. 왕을 호위하는 소규모 군대는 있었지만 아직 상비군 체제는 아니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제후국의 백성들이 임시로 소집되었고 군대 규모는 1만 명 정도였다. 주나라에 들어서면 상비군이 처음으로 만들어지고 수만 명의 군대가 왕의 직속 군대로 활약했으며 호경을 지키던 6사(師)와 낙읍을 지키던 8사, 나중에는 22사가 있었다. 물론 주의 전쟁에는 제후국의 군대도 소집되었다.

상 · 주 시대의 전쟁은 대부분 황하 중하류의 평원지대에서 벌어졌다. 주로 전차가 평원지대를 달리며 전투를 벌이는 전차전의 형태였기 때문에 보병은 보조적인 역할만 담당하였다. 큰 전투에는 3,000대 정도의 전차가 동원되었다. 당시의 군인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고귀한 직업이었기에 하층 귀족인 사(士)가 상비군이 되었고, 전시에는 성 안에 사는 평민인 '국인(國人)'도 참여하였으나 성 밖의 평민인 '야인(野人)'이나 상인, 노예 등은 전쟁에 참여할 자격이 없었다.

전차전은 말하자면 귀족형 전쟁이었다. 일정한 진법에 따라 전차가 죽 늘어선 상태에서 북이 울리면 공격이 시작되었고 전투 도중에도 양쪽 모두 예절을 지켰다. 무엇보다 용맹과 신의를 중하게 여겼다. 춘추시대까지는 대략 전차전 중심의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말기에 이르면 점차 기병이나 보병이 중요성을 띠게 되면서 커다란 사회변동이 수반되어 새로운 형태의 국가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게 된다.

춘추시대에는 주나라의 권위가 무너진 자리에 강력한 군사력을 쥔 패자(覇者)가 등장하여 중원의 정치를 좌우했다. 패자를 중심으로 각 제후국이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였다. 다섯 사람의 유명한 패자가 있어 이를 '춘추 5패'라고 부른다. 춘추 5패는 기록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최초의 패자가 된 사람이 제나라의 환공이다. 이때는 초나라가 남방에서 흥기하여 강성해져서 중원을 위협하고 있었다. 중원의 여러 나라들이 동방의 제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각국의 동맹이 이루어졌다. 그는 관중을 재상으로 등용하고 혁신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부국강병에 성공함으로써 최초의 패자가 될 수 있었다.

춘추시대에 주 왕실은 하나의 소국에 다름 아니었으나, 주 왕실을 존중한다는 명분이 제후들에게 호소력을 지닐 만큼 아직 그 권위는 인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초나라 왕이 스스로를 왕으로 칭한 이후 세력이 약한 제후들까지도 왕을 자처하고 있었으며, 겉으로 주 왕실을 존중해 주는 척하던 봉건제도의 잔재는 전국시기에 이르면 깨끗이 사라지게 된다. 전국시대는 진(晉)나라가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분열했던 기원전 453년, 혹은 주 왕실이 이를 공인한 403년 이후의 시기이다. 주 왕실이 직접 제후국으로 봉한 진나라가 내부의 하극상으로 분열함으로써 봉건시대가 공식적으로 종언을 고한 것이다. 오로지 강한 국가만이 스스로 실력을 입증하여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실제로는 춘추시대에도 각국은 독자적인 영역 국가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춘추좌전》에 의하면, 소국 송의 재상 화원은 통행증 없이 송나라의 영토를 통과했던 대국 초의 사신을 사형에 처했다. 《사기》에 의하면, 오나라와 초나라는 국경에 서 있는 뽕나무의 소유에 관한 양국 주민의 시비가 원인이 되어 대규모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춘추시대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나라로 중원을 대표하는 진(晉)나라와 양자강 유역에서 새로이 성장한 초(楚)나라를 빼놓을 수 없다. 춘추 5패로 진의 문공과 초의 장왕이 잘 알려져 있다. 초는 더 남쪽의 신흥국 오(吳)와 월(越)의 약진으로 잠시 위기를 맞았는데, 오의 합려와 그의 아들 부차, 월왕 구천 등이 역시 춘추 5패로 거론된다.

오와 월은 보병 중심의 새로운 전법을 터득하고 일찍이 철기의 기술을 습득하여 강성해졌다. 오와 월이 소유했다는 명검의 전설이 전해지던 중에, 근래에 발굴된 무덤에서 유명한 월왕 구천의 검이 실제로 발견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2,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칼날은 지극히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날 밑의 양면에는 남색 유리와 터키석이 정교하게 상감되어 있는데 현대의 공예가도 어떻게 칼날 부분에 이러한 무늬를 넣을 수 있었는지 감탄할 뿐이다.



호북성 강릉현에서 발굴된 월왕 구천의 검.
초나라 묘에서 나온 이 칼에는 '월왕구천자작용검'이란 글이 새겨져 있고 지문까지 남아 있다.
오왕 합려는 즉위한 후 9년 동안 국력을 키워 초를 공격했는데, 다섯 번 싸워 다섯 번 이김으로써 초를 위기에 빠뜨리는 등 강성함을 자랑했다. 그러나 월왕 구천과의 싸움에서 손가락을 부상당한 후 이것이 원인이 되어 죽음에 이르렀다. 그가 강소성의 해용산에 묻힐 때 10만 명의 인부가 동원되었으며, 묘 안에는 3,000자루의 명검이 함께 묻혔다고 한다.

합려의 아들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와신(臥薪)', 즉 땔나무 위에서 잠을 자면서 고통을 상기하고 국력을 키워, 회계산의 전투에서 월왕 구천의 굴복을 받아내었다. 그러나 구천은 부차에게 뇌물과 미녀를 보내어 마음을 안심시키고, '상담(嘗膽)', 즉 쓸개의 쓴맛을 매일 맛보면서 스스로에게 회계산의 굴욕을 상기시켜 결국은 부차를 물리쳤다.

각국이 패자로 등장하는 과정을 보면, 각 패자의 뒤에는 훌륭한 재상들이 있다. 제나라 환공에게는 '관포지교'의 아름다운 우정을 남긴 관중과 포숙이 있었고, 오나라 합려와 부차에게는 오자서가 있었으며, 월왕 구천에게는 범리가 있었다. 부차는 구천에게 패하고 자결할 때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는데, 그 이유는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패하여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제 환공은 포숙으로부터 관중의 인물됨을 듣고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과거의 행적까지 과감하게 묻어버린 채 그를 재상으로 등용하는 용단을 내렸다. 바야흐로 실력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각국의 군주들은 기존의 명문귀족들의 세력을 억압하고 세력기반이 없는 평민출신의 인재들을 과감히 등용하여 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화를 꾀했으며, 저마다 부국강병에 힘써 항쟁의 대열에 나섰다. 빈번한 전쟁 속에서 과학기술은 더욱 발전하여 통일 국가의 기초가 마련되었으며 훌륭한 사상가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철기의 보급과 함께 전국시대에 더욱 확대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춘추 5패, 열국이 각축을 벌이다 - 춘추시대의 개막(기원전 770년)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3.23, 가람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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